[최진석의 추모] ‘여명의 철학자’ 김형효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

김형효 교수(1940~2018) <출처 서강대총동창회>

1992년 북경의 어느 날, 늦은 봄이었다. 볕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뜨겁고 넉넉했다. 나는 중국의 북경어언학원(北京語言學院, 지금은 語言大學) 중국어 고급과정을 다니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북한에서 온 학생 하나가 외국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고, 나는 그늘 좋은 나무 아래에서 한국 집에서 온 소포를 뜯었다.

김형효 교수님의 책이었다. 서문에서 ‘승화되지 못한 이데올로기’로 고통받았던 지난 시절을 언급하신 대목을 읽다가 나는 목이 메었다. 승화되지 못한 이데올로기! 내가 대학 1학년인가 2학년 때, 캠퍼스에는 어용교수 문제가 큰 이슈였다. 김형효 교수님은 새마을운동을 지지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에 대하여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던 일들로 어용교수로 몰리셨다. 그때 나는 김형효 교수님 연구실 앞에서 “어용교수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오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1990년 8월 23일 나는 다니던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자퇴하고, 중국 하얼빈의 흑룡강대학에 갔다. 그냥 거친 땅 어느 곳을 헤매며 삶 전체를 다시 성찰하는 기회가 필요했다. 수교도 되지 않은 사회주의국가 중국, 그것도 하얼빈을 택했다. 하얼빈에서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했다. 그의 표정에서 나를 모른 체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고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살만한 나라는 아니다. 더구나 추종해야 할 모범적인 나라로 받아들일 수는 절대 없다.

나는 하얼빈에 온 지 100일 만에 심하게 앓았다.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대학가의 습성과 인식을 극복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중국에서 북한 학생들도 만나보면서 사회주의국가에 대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해체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나는 북한을 동경하거나 사회주의에 희망을 거는 일 따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본주의의 수정으로 가능하지, 사회주의로 대체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박정희 비판이 박정희 수정으로 귀결되어야지, 박정희를 버리고 바로 김일성 품으로 달려갈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을 신념화하지 않고, 내가 직접 본 것을 바탕으로 내 신념을 스스로 생산하였다. 이런 식으로 사고의 진화를 겪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김형효 교수님의 ‘승화되지 않은 이데올로기’라는 구절을 봤으니, 죄책감과 부끄러움 등이 뒤섞여 목이 메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비자 문제도 복잡하고 비행기 삯도 부담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조급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여 김형효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마 사흘 후였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귀국하여 김형효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김형효 교수님은 20대부터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려던 자신이 너무 순진했으며, 이제는 그런 것이 다 헛된 정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환멸을 느낀다고도 하셨다. 그분의 마음속에 회한과 화가 깊고 넓게 퍼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찾아뵈었을 때는 젊은 시절에 공부하셨던 루벵대학에서 더 깊이 공부하고 돌아오신 직후였다.

그날 내게 해주셨던 말씀 중에 비교적 깊이 새기고 있는 내용이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머리말에 잘 정리되어 있다. “오랜 세월 속에 축적된 과학지식에서의 평균적 역량과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 자연화시키는 감수성의 질 – 아름다움이 없는 도덕은 거친 소음만을 낳는다 – 이 없이는 선진문화 민주국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면서 또 내게 너무 가난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교수님은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루벵대학 철학과에서 유학하셨다. 당시 교수님의 어머님께서 힘들게 마련해주신 20달러가 소지한 전 재산이었다.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1박을 하셨다. 다음 날 아침 일행들이 식사하러 가자고 방문을 두드리는데, 교수님은 안 먹어도 된다면서 식사를 거르셨다 한다. 나중에 벨기에에 가서야 아침 식사가 호텔 값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돈을 아끼려 밥을 먹지 않고 벨기에까지 배고픔을 참으며 왔던 그 기억에 참 서러웠었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가난하면, 이렇게 비굴해질 수 있으니, 너무 가난하지는 않게 살아야 한다는 당부도 해주셨다. 이런 가난의 기억 때문에 김형효 교수님은 이 나라를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교수님은 1968년 루벵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당시는 대한민국이 한참 기아선상에서 어려울 때이다. 대한민국은 1973년에야 기아 국가에서 벗어났다.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365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김형효 교수님과 지적인 교류에서 그치지 않고 철학자의 태도나 영혼의 승화 등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교류하였다. 철학자를 넘어 철학가가 되는 일도 논하였다. 내가 여기서 은사님이셨던 교수님과 ‘교류’를 했다고 버릇없이 표현하는 까닭은 교수님의 학자적 객관성과 겸손의 향기가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진짜 아는 사람의 글은 쉽고, 깨달은 자는 낮으며, 가장 높은 영혼은 명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교수님은 헛된 정열이나 환멸로 표현되던 회한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극점에 이르신 후, ‘신의 명랑성’에 도달하셨다. 그리고 철학가로서의 인격적 교류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나와 명랑하게 나누면서 기뻐하셨다. 나는 ‘광이불요’(光而不耀)한 교수님의 눈빛과 아직 웃음을 배우기도 전의 어린애 같은 미소를 내 영혼의 한 가운데에 심어두었다.

하지만, 김형효 교수님은 외로우셨다. 철학계마저도 교수님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는 말을 인정하면서 우리 삶의 현장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에게 철학적 높이의 시선이 있기는 한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동양에는 철학과 과학이 없었거나 아주 미미했다. 철학과 과학보다는 사상(이데올로기)과 기술이 더 중심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에 전국이 동원되어 철학과 과학을 학습하는 기간을 가졌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시선의 높이나 사유의 질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이렇게 척박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김형효 교수님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고 철학을 하는’ 혹은 ‘철학적 사유를 철학적 방법으로 하는’ 철학자셨다. 철학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선명한 특징은 자신의 세계에서 포착한 구체적인 문제를 보편의(추상적인) 높이로 해결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포착한 고유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아포리아)가 없으면 철학적 사유는 시작되지 못한다. 철학은 남들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수용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고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독립적인 사유로 자신의 문제를 보편의(추상적인) 높이에서 해결해내는 것이 철학이다.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 철학이지, 사유의 결과를 사유하는 것이 철학은 아직 아니다. 김형효 교수님은 분명한 문제의식을 품고 계셨다. 가난을 극복한 떳떳한 나라를 세우는 일, 자유주의를 지키는 일, 인격 혁명과 사회혁명을 동시에 완수하는 일, 갈라진 이념성을 분열이 아니라 조화로 승화하는 일, 주자학적 명분론을 극복하는 일 등 종합적으로 당시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안는 ‘철학의 길’을 당당히 걸으셨다. 그의 저작은 모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철학적 사유의 노고가 낳은 결과물들이다. 선구자가 외롭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그의 외로움과 따돌림은 그가 유일한 철학자였음을 오히려 증명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그를 받아들일 정도로 ‘과학지식에서의 평균적 역량과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 자연화시키는 감수성의 질’이 준비되지 못했다. 선구자적 의식을 가진 교수님은 그것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공심(公心)을 품으셨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그 깃발에 다가갈 정도로 성숙한 사고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 날개를 펴”지만, 교수님은 우리에게 여명을 깨우며 오셨고, 우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잠든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잠에서 깰 수 있을까? 김형효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려 하면, 그보다 먼저 이 답답한 질문들이 앞선다. 잠든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이렇게 질문하는 일이 아마도 내가 김형효 교수님을 추모하는 한 방식으로 굳을 것 같다.

나는 그를 ‘여명의 철학자’로 부르고 싶다. 철학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땅에서, 그는 철학의 새벽으로 왔다 갔다. 그가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첫 사람이었다면, 철학적 방법으로 철학을 하는 첫 사람이었다면, 그는 한반도의 첫 철학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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