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짐승의 숫자, 666
*요한계시록 13-15장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요한계시록 13장 18절)
666, 이 숫자를 성경에서 처음 읽은 사람이 우리 중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는 이 숫자를 성경에서 만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양한 곳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생긴 모종의 프레임 속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내가 맞다고 여기는 바를 확인하는데 성경이라는 자료를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확증편향이라는 나의 심리적 기제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만약에 짐승의 표라는 것이 내 속사람의 영적 상태와 아무 상관 없이 내 몸에 심겨지거나 새겨져서 영적인 효험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나에게 그것은 부적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계시록이라는 편지에 적힌 이 숫자를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로 읽었을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적용될 수 있을지를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요한계시록이 인류역사의 끝이라는 한 시점에서만 일어날 일을 기록한 책이라면, 사도요한을 비롯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을 읽은 셈이 됩니다.
반대로, 요한계시록이 1세기 로마 치하에서 벌어진 기독교 탄압에 국한된 내용이라면 오늘날 우리들 또한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을 읽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법률용어나 과학적 서술이 아닌 그림언어로 요한에게 말씀하셨을까요? 모든 시대에 걸쳐 어떤 상황에도 그에 맞추어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주신 것입니다.
계시록의 내용은 로마 황제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도, 교황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도,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AI가 지배할 것이라는 세상에서도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짐승의 표를 이마에 그린 사람처럼 살다가, 또 어떤 때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에 쓴 사람처럼 삽니다.
계시록의 숫자와 그림은 누군가를, 혹은 어떤 방법론을 특정 짓고 낙인 찍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는 날이 하루라도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직접 쓰신 그림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