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파노라마③]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독립운동가에서 독재자로
1965년 7월 23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망명지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대통령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반발이 심해 가족장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국부’로까지 추앙받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이 마지막 떠나는 길은 매우 쓸쓸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 경제의 어려움으로 악화되는 민생고, 야당 대통령 후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너진 ‘못 살겠다 갈아보자’던 정권교체의 희망, 사상 최악의 부정으로 얼룩져 무효가 된 3.15 부정선거, 경찰 발포로 시민 목숨을 앗아간 4.19의 분노 등이 그때까지도 시민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기억들은 지금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반면에 이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해방 직후 좌우대립이 심했던 상황에서 신탁통치를 막아내고, 소련의 방해를 꺾고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대한민국을 수립한 공로를 부각시킵니다. 대통령 재임시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습니다.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보아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로서 활동과 대통령으로서의 국정운영에 대해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의 독립운동은 1898년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독립협회 활동에서 출발합니다.
1899년 박영효와 관련된 고종황제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이승만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탈옥하려다 실패해 종신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4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민영환과 한규설 주선으로 독립청원을 위해 미국에 가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조지 워싱턴대(학사), 하버드대(석사)를 거처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 후 기독청년회 활동하다 1912년 체포됐으나 선교사 주선으로 풀려난 뒤 미국으로 갔습니다. 1913년 하와이로 옮긴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부터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후 세워진 한성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정도 상해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주된 활동무대는 하와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에서 논의되지 않은 독단적인 활동들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탄핵 후 박은식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이 됐습니다.
해방 뒤 초대 국회의장을 거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무시하고, 경쟁자를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또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를 보였고 개인숭배현상도 나타났습니다. 1949년 3월 26일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리고 중앙청 광장에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무슨 날이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 생일이었습니다.
제3대 대통령선거가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1956년 3월 31일에는 서울 탑골공원에 24m 높이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이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동상입니다. 이승만 제3대 대통령이 취임하는 8월 15일에 열린 동상 제막식에서는 이 대통령에 대한 만세삼창 소리가 드높았고, 축하 불꽃이 서울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이 동상은 4.19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됐습니다. 1954년 9월 18일 철도창설 55주년 기념식에서 이 대통령 흉상이 제막됐습니다. 철도창설과 이 대통령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요? 1959년 10월에는 이 대통령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화폐 8종이 발행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무감각하다 보니 ‘국부’가 ‘독재자’로 전락한 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