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윤석열 대통령과 첫 한미정상회담 바이든의 ‘이력’

20일 오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는 윤석열(왼쪽) 대통령과 바이든(오른쪽) 대통령

 

20일 한국에 와 평택 삼성전자를 방문하고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첫 한미정상회담을 갖는 바이든 미 대통령의 본명은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2세다. 그는 1942년 11월 20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다.

사업가인 아버지 조 바이든 시니어 밑에서 어려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950년대 석탄생산과 철도파업으로 타격을 받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의 아버지는 보일러 청소도 하고 중고차 딜러를 하며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바이든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강인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조 바이든(왼쪽)과 아버지 조 바이든 시니어. <사진 트위터>

그의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챔피언은 얼마나 많이 쓰러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로 결정된다.”

어린 시절 바이든은 말더듬이 심했다. 친구들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를 “바이, 바이”라고 놀렸다. 바이든은 말더듬을 고치기 위해 입에 돌을 물고 다녔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책읽기를 시킬 것으로 보이면 사전에 읽어야 할 부분을 외워갔다. 그리고 책읽기를 했다.

바이든은 1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델라웨어 메일필드로 이사 갔다. 그곳에서 아치미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카톨릭 명문이었다. 그의 종교가 카톨릭인 것도 이때의 영향이다. 그는 학교를 다니며 학비를 벌기 위해 학교 창문을 닦고 잔디 깎는 일도 했다.

덩치는 작았지만 미식축구팀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했다. 그가 몸담았던 아치미어 고교팀은 당시 무적의 전설로 남아있다. 당시 코치는 그를 대단히 말랐던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최고의 리시버’였다고 했다. 바이든은 델라웨어 대학에 진학해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도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바이든은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학교를 방문, 그곳에서 한 연설을 듣고 자신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바이든은 대학 3학년 때 시라큐스대학 학생인 네일리아 헌터를 만났다.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당시를 털어놓았다. 바하마 여행지에서였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서였다.

그는 1965년 델라웨어대학을 졸업한 다음 다시 시라큐스대학 법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시라큐스 법대에서 논문인용을 잘못하는 바람에 낙제를 하고 말았다. 1968년 법대를 졸업한 다음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국선변호사로 활동했다. 이어 1970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신을 피력하며 델라웨어주 뉴캐슬카운티 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9세 때인 1972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민주당의 설득으로 상원의원에 도전했다. 현역 공화당 칼렙 보그스 의원과 붙어보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상원의원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불행이 닥쳐왔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한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부인과 세명의 자녀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형사고였다. 사고로 부인과 딸이 숨지고 두 아들은 크게 다쳤다. 그토록 사랑했던 부인과 가족을 잃은 것이다. 바이든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다고 전한다.

그는 “신이 지독한 장난을 쳤다고 생각해 크게 화가 났다”고 뒷날 회상했다. 이듬해인 1973년 델라웨어주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선서를 워싱턴에서 하지 않았다. 아들이 입원해 있던 현지 병원에서 했다. 그는 남은 두 아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윌밍턴에 남았다. 매일 기차로 워싱턴으로 출근했다. 그러면서도 상원의원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했다. 그는 1977년 두 번째 부인인 질 제이콥스와 재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81년 딸이 태어났다.

2015년 남편 바이든 부통령과 동행해 한국을 방문해 진관사를 찾았던 질 바이든 여사. 왼쪽은 계해 진관사 주지스님

아픔을 그렇게 묻고 살았다. 조 바이든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 거장이다. 80세 나이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서 그는 1973년부터 2009년까지 상원의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을 역임했다.

1988년에는 대선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법대에 다닐 때 논문표절 논란으로 3개월만에 도중 하차했다. 이 과정에서 심한 두통을 앓았다. 병원의 진단을 받았다. 뇌동맥류가 파열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뇌수술을 받았다.

또다시 폐에 혈전이 생겨 또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고난을 겪고 7개월 만에 상원에 복귀했다. 그는 상원에 있으면서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다룬 ‘여성폭력방지법’을 발의했다. 2002년에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을 찬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라크전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7년 그는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후보에 도전하면서 그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차했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후보가 그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오바마는 그의 오하이오와 펜실바니아주의 지지가 필요했다. 게다가 바이든은 블루칼라의 지지도 많이 받고 있었다.

조 바이든은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8년간 봉직했다. 그것은 그에게 대권 도전기회를 확장시켜 주었다. 2008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도 부통령에 당선됐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그도 부통령에 재임했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2015년 첫째부인이 낳은 큰 아들이 암으로 사망했다. 46세였다. 그는 델라웨어 검사출신이었다. 바이든은 크게 아파했다. 그가 72년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었을 때 크게 다치고도 살아남았던 아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어나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왼쪽부터 둘째 아들, 부인 질 바이든, 바이든 당선자, 장남과 손녀

2020년 다시 대권에 도전해 트럼프에 승리했다. 바이든은 친환경정책에 앞장선 인물이다. 석탄과 천연가스 중심으로 된 에너지개발 방식을 친환경으로 바꾸겠다는 입장이다. 전기차를 선호하고 2050년까지 미국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는 의료서비스에 대해서도 전임인 트럼프와는 다른 정책을 가지고 있다.

오바마가 추진했던 오바마케어의 범위를 더 넓혀 전국민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불법 이민자도 보험혜택을 주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돈 많이 버는 개인과 기업은 그만큼 세금을 내야한다는 게 바이든 정부다. 바이든은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를 강화하는 정책에 따라 기존 정부가 이란과 중동 테러 세력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면, 바이든은 더욱 중러 견제에 나서고 있다.

북한문제에도 강경 입장이다. 핵과 관련된 구체적인 약속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북한 김정은을 만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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