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윤명란 독자가 이동순 시인한테 보낸 봉함엽서 속엔…

윤명란 독자가 이동순 시인한테 보낸 봉함엽서

문학을 즐기는 독자들은 언제 어디에 살고 있더라도 항상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 서린 묘미를 뽑아내어 스스로 삶의 생기와 활력을 얻을 줄 안다. 이런 독자들의 안목은 꽤 수준 높다. 오늘 소개하는 편지는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한 교민이 보내온 봉함엽서이다. 제한된 지면에 아주 빼곡히 써내려간 그의 문학 사랑과 바지런한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명을 준다.

그녀는 작가 김주영의 소설을 읽다가 거기 삽입된 나의 시작품 몇 편을 발견하고 어떤 감흥을 느껴서 서점에 있는 나의 모든 시집을 찾아 구입해서 읽었다는 그런 재미있는 고백을 들려준다. 지금 분명친 않지만 ‘장날’, ‘아우라지 술집’ 이 두 편의 시가 아닌가 짐작한다.

우리 말의 묘미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관심이 해외에서 더욱 강렬하게 일어나는 한 독자의 특별한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후 그녀가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는지 아니면 더 오래 머물게 되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가 보내온 편지는 이것이 유일하다.

윤명란 독자의 이동순 시인 편지시를 쓰고 책을 여러 권 발간하노라면 이따금 독자의 편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글들은 알게 모르게 든든한 힘과 용기를 준다. 위로와 성원, 격려가 창작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창작의 상당한 힘은 독자들로부터 제공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문학이 독자를 형성시키고 독자가 문학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이런 편지를 받고나면 괜히 신바람이 나고 즐겁고 유쾌해지며 콧노래도 흥얼흥얼 나온다. 신선한 활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지난날 어떤 시인은 시가 외면 받는 시대에 단 한 사람 자신을 아끼고 이해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를 위해 계속 작품을 쓰겠노라는 그런 외로운 장담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걸 보면 시인도 늘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거의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지만 길이 남을 절창 한 편을 빚어내려고 오늘도 모색하고 궁리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굴레이며 운명인지도 모른다. 아래는 2001년 1월 받은 윤명란 독자 편지다. 

 

지난해 말 가족을 만나러 한국에 갔다가 시집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객주>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아리랑 난장>을 사들고 와 읽다가 그 안에 인용된 두 편의 시가 마음에 자연스레 와 닿았습니다.

<아리랑 난장>은 <객주>의 아류에 불과한 것으로 흡사 치마저고리에 뾰족구두를 받쳐 신은 서민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책방에 가야 했고,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작가의 모든 시집을 뽑아들고 이곳에 돌아와 곰새기며 읽고 있습니다. 저는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지 4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아이들은 사춘기의 절정을 이곳에서 겪으며 하나는 올해 대학에 또 하나는 고등학교에서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온 이후로 우리 글을 잠시 젖혀두고 신문잡지에서 문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말과 글에 부딪치며 그들의 정서와 생각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에 외국에 나와 그 나라 말과 글로 자신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어떤 짐덩어리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지요. 게다가 이민온 지 오래된 분들의 입에서는 영어인지 우리말인지 알 수 없는 표현들이 쏟아져 나오고, 한국어방송의 진행자들에게서는 그 자질이 의심스러운 저속한 말들이 옳지 않은 어법에 실려 쏟아져 나옵니다.

하기야 요즘은 한국에서 직송되는 TV 드라마를 보아도 특히 젊은이들의 어투가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와중에 살다보면 가끔은 내 의지로선 어쩔 수 없는 정신의 공백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럴 때는 달리 약이 없고 우리말의 진한 정서에 다가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서정주님의 시도 좋은 약이고, 얼마 전 친지가 사다준 이문열의 “아가”도 저를 많이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이 지혜로워지는지 풀어놓은 산문보다 응축시키고 속으로 영근 작품이 좋아집니다.

따뜻한 인간미가 어려있는 좋은 글을 써 주셔서 감사드리려고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자라난 사람이고 전형적인 현대인이지만 좀 더 나이들어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가 오면 지리산 어느 자락에 자리잡고 살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제는 그 선택의 범위를 넓혀 경상도 깊은 구석도 둘러보아야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영남대 국문과 학생들에게
복이 많다는 말씀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2001년 1월 9일
미국 LA에서

윤명란 올림

이동순 시인에게 도착한 윤명란 독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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