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 ’25돌’
6·10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서슬 퍼런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의 서막을 알리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20여일동안 자발적으로 거리로 몰려나와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역사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9년 12·12사태(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간선제로 선출됐다. 전 대통령의 군부 정권은 도덕성 결여와 비민주성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야권과 재야세력의 직선제 개헌 공세 대상이 됐다.
1986년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명이 동참하는 것은 물론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이른바 ‘4·13 호헌(護憲) 조치’를 통해 독재군부정권 유지 뜻을 천명한다.
이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 박종철씨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1월14일 숨졌다.
당시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 발표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6월9일 연세대 2학년이던 이한열은 학교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뒤 사경을 헤매다 7월5일 끝내 숨졌다.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섰고, 꽃다운 두 젊은이의 희생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5월27일 꾸려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다. 박군의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였다.
주요 도시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로 거리가 메워졌다.주요 도로 곳곳의 교통이 마비됐지만 시민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손수건과 자동차 경적으로 호응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는 전국에서 울려퍼졌다. 이날만 22개 지역에서 24만여명이 참가한 것으로 주최측은 추산했다. 경찰에 연행된 시위대도 수천명에 달했다. 구속된 이들은 국본 간부를 포함한 220여명이다.
대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5일여 동안 명동성당에서 집회가 이어졌고 낮에는 넥타이부대와 일반시민들이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6월15일 다시 전국적으로 되살아난 시위 불씨는 26일 전국 3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까지 계속됐다. 이 때까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5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결국 전 대통령은 이에 굴복,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당시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민중의 힘으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1960년 4·19혁명과 같이,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같이 민중 역사의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6월항쟁은 그해 12월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완의 역사로 마무리됐다.
‘6월항쟁 25주년 행사 국민추진위원회’ 서우영 조직팀장은 “6월항쟁은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했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경찰의 최루탄 가스와 폭력에 맞서며 거세게 저항한 투쟁의 역사”라며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며 이뤄낸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와 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6월항쟁의 민주정신은 단순하게 기록된 역사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영원히 계승해야 할 살아있는 민주주의 역사”라고 덧붙였다.
1987년 6·10 민주항쟁 전개과정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
▲3월3일 ‘고(故) 박종철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 구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군 49재와 고문 추방 국민대행진 개최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 발표(4·13 호헌조치)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 폭로
▲5월27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4·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교내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피격
▲6월10일 국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개최. 명동성당 농성 투쟁 시작
▲6월11일 도심 곳곳에서 시위
▲6월15일 전국 45개 대학생 6만8000여명 시위 가담
▲6월18일 국본, 전국 주요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결의대회’ 개최. 전국 150만명 참가(주최측 추산)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전국 37개 지역에서 180여만 명 시위 참가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발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시국 수습을 위한 8개항 선언
▲7월5일 이한열 사망
▲7월9일 고 이한열 영결식. 시민·학생 1백여명 서울 시청 앞 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