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33] 김혜경-김건희와 ‘다른 수단의 정치’
“ … 꽃은 다른 수단의 정치 / 반목과 대립이 없지 / 뿌리는 흙속에서 잎은 허공에서 / 물과 바람 / 상생의 손 움켜쥐고 /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네 … ”
시인 이영식 선생의 시집 『꽃의 정치』에 실린 시 ‘꽃의 정치’의 일부입니다. 평론가들은 시집 『꽃의 정치』가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의 소산’이라고 말합니다.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정치의 역할을 생각의 차이나 이해관계의 충돌로 생기는 사회의 수많은 갈등과 대립, 반목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정치가 문제를 공평하게 해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영식 시인은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권력다툼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선거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위임합니다. 권력을 위임받아 유지하고 확대하려면 게임의 규칙에 따른 정정당당한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문제는 시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쟁취해야 할 목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시민 행복을 위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부턴가는 권력을 위해 검찰이나 법원 등에 기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다른 수단의 정치’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라고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해결해 달라고 하는 건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시민이 위임한 권한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갖다 바치는 건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무능과 무책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제18대 국회에서 무리하게 통과된 미디어법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법적 효력은 인정하면서도 표결과정에서 일어난 재투표와 대리투표 등 절차상 하자를 지적했습니다.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를 국회가 자율적으로 시정하라는 취지였으나 국회는 끝내 시정을 거부했습니다.
국민의힘이 어제 이재명 후보와 부인을 직권남용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조사는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윤석열 후보와 부인도 고발을 당한 상태입니다. TV 토론도 양자토론이냐 4자토론이냐를 놓고 법원 판단에 목을 맸습니다. 윤석열 후보 부인 7시간 녹취록 방송 문제도 법원의 최종결정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갈등의 조절이라는 정치의 기능이 법률적 판단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상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라고 말들이 많은데, 문제만 생기면 검찰과 법원을 바라보는 행태에 시민의 실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수단의 정치’에 계속 기대면 시민들이 정치불신을 넘어 정치를 혐오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누구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면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바로 검찰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시민의 대표’들이 논의를 거쳐 해결해야 할 정치적 사안까지 무조건 제3자의 손에 떠넘기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영식 시인이 시 ‘꽃의 정치’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는 “반목과 대립이 없”는 “상생의 손 움켜쥐”는 정치입니다.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는 “꽃의 정치”는 “행복”을 주는 정치를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을 주는 정치를 꽃피우기 위해 정당과 국회가 ‘다른 수단의 정치’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