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32] TV토론, 재치문답이나 장학퀴즈 아냐···진정성 확인할 기회로
우여곡절 끝에 제20대 대통령선거 첫 번째 4자 TV 토론이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이뤄졌습니다. 시민 10명 가운데 4명이 TV 토론을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TV 토론이 도입된 1997년 제15대 대선 이후 가장 높은 시청률입니다. 후보들의 됨됨이와 자질, 그리고 정책과 공약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12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다루었기에 깊이 있는 토론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시청자들이 부동산 문제, 일자리 창출, 외교·안보, 기후위기 대응 등에 대해 후보들의 생각과 공약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차별성을 읽을 수 있었을 겁니다. 시민들의 판단과 선택에 도움이 될 후보간 비교 평가도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시민들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정치관련 정보를 얻습니다.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는 후보와 시민이 직접 만나는 대면 선거운동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날마다 많은 공약을 쏟아져 나오지만 시민이 그 많은 공약을 일일이 확인하기도, 어느 공약이 더 나은지 따져보기도 힘듭니다. 공약만으로는 후보의 품성과 자질을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TV 토론은 매우 유용합니다. TV 토론을 지켜보면서 후보들을 비교 평가할 수도 있고, 후보에 대해 새로운 걸 알게 되고, 이런 정보가 시민의 판단과 선택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TV 토론이 다른 나라에서도 선거캠페인의 주요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TV 토론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회피 경향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성향 믿음 신념 등이 미디어의 효과를 막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나 성향에 혼란을 주기에 자신이 알고 있거나 믿고 있던 것과 다른 정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이한수 경희대 교수의 연구에서도 TV 토론 시청을 통해 시민들이 지지후보를 바꿀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정책과 도덕성이라는 후보 평가기준도 TV 토론의 효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지지 후보가 있는 시민들은 TV 토론 결과와 무관하게 계속 지지하겠다는 반응이 더 많습니다.
이한수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후보 평가에서 능력을 중시하는 시민일수록 TV 토론을 시청하면서 자신들의 기존 선호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지지 후보를 바꾸도록 하는 주요 변수는 당파성과 이념 강도라는 게 이 교수의 결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토론은 더욱 자주 열려야 합니다.
꼭 4자 토론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제도 국정 현안 전반을 다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이재명-김동연 후보처럼 양자토론을 할 수도 있고, 무산되었던 이재명-윤석열 양자토론을 다시 추진할 수도 있고, 3자 토론, 4자 토론 등 다양하게 TV 토론을 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후보들에게 토론의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야 합니다.
깊이 있는 집중적 토론을 통해 후보들 사이의 변별력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토론주제도 핵심적 현안으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최근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 긴장이 높아졌으므로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만을 다룰 수도 있고, ‘미래세대와의 동행’이라는 주제로 청년정책을 다룰 수도 있을 겁니다.
TV 토론에서 후보들은 발언에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TV 토론은 지식의 많고 적음을 확인하는 재치문답이나 장학퀴즈도 아닙니다. 신상발언이나 덕담, 또는 막연하게 잘 해보겠다는 식의 답변은 필요 없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장밋빛 공약도 안 됩니다. 국정운영을 위한 자신의 비전과 능력을 드러내도록 애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