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관계의 달인’ 되는 지름길 ‘SAFE'(멈·수·직·표)
새해를 맞으면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를 세운다. 다이어트, 영어공부, 운동하기 등은 단골 메뉴이다. 최근 들어 분노와 화 조절하기, 상대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등의 마음 다스리기 목표도 부쩍 늘고 있다.
나도 임인년 새해맞이 첫 시작으로 명상모임에 참여한 후 성당을 찾았다. 신년 첫 미사는 더없이 거룩하고 차분하게 느껴졌다. 신부님께서 정성껏 드리는 미사 예식으로 한층 더 고요해진 나는, 그 여운에 잠겨 귀가해서도 주보 속 교황님 말씀을 읽으며 명상 상태에 잠겼다.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 말이다.
L님의 첫 목소리는 항상 그렇듯 경쾌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힘있는 말투에 “올해는 꼭 건강하라”는 덕담까지 주었다. 나도 감사하다며 기분 좋게 응대했다. 우리는 새해 아침,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나누었다. L님은 교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목사님 말씀이 무척 신선하고, 감동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감탄사와 칭찬을 쏟아냈다. 나는 그의 찬탄에 살며시 독백조로 말을 건넸다. “가톨릭 미사는 예식이 중심이고, 신부님 강론도 생활 속 얘기보다는 보통 교리 중심으로 펼치신다”고. “그래서 말씀으로 뜨거운 감동을 받은 경험이 적고, 오늘 강론도 주보에 있는 교황님 말씀으로 읽어 주셨다”고 했다. “하여 목사님 말씀에 감동받은 님의 얘기가 새롭고 부럽기까지 하다”고 했다.
그러자 예상밖으로 L님의 거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그런 얘기 들으면 이해가 안 가. 성직자가 하는 일이 뭐지? 말씀을 준비해서 신도들이 감동을 받아 생활 안에서 잘 살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신년 초에 주보에 있는 말씀을 읽어주는 게 성직자가 제대로 하는 역할이냐고. 나라면 그런 종교에 다니지 않겠어!”
나는 입이 살짝 벌어지면서 굳어졌다. 폰을 움켜쥔 손도 꽉 조여졌다. 그는 공격적인 템포로 계속 휘모리 장단으로 쏟아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내가 본 신부님들은 많이 실망스러웠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예비 목사님들을 정말 헌신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목사님의 거룩한 행실을 말하면서 자신이 본 신부님들의 모습을 거침없이,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일순간 나도 확 따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불쾌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파충류의 뇌가 ‘저도 실망스런 교회목사님을 많이 보았어요’라고 반론하며 덤벼들라고 지시하는 듯했다. 원숭이처럼 날뛰는 감정의 뇌도 ‘속 상해서 너무 화난다고 말해!’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 와중에 이성의 뇌가 희미하게나마 작동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되뇌었던 “나는 빛과 사랑이야”라는 주문을 외우며 참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빛과 사랑이었으면 내 기분이 상했을까? 내가 느끼는 무의식적 반응은 이미 나는 聖女가 아니라고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성스러운 척해봐야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감정의 업만 더 쌓는 꼴이었다.
한쪽 마음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천비키, 아무리 수행하고 기도하면 뭐해? 아직도 너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불쾌해 하잖아’라는 비난의 심판자 소리였다. L님은 이런 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얘기했고, 나는 힘빠진 목소리로, 어른에게 할 수 있는 공손한 태도로 “예, 예…”하며 흘려듣고 있었다. 그도 조금은 눈치를 챘는지 약간 멈추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 교회도 잘못하는 목사님들도 많다”라며 한 발 물러서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데 성당 신부들은 숨어서 하니 위선적인 게 더 문제야. 하긴, 모두의 문제이지”라고 일축했다. 그러더니 이내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이미 대화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예의 삼아 응대를 해준 후,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우리 관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마음은 무엇을 원하는가? 안 봐도 될 사이가 아니었기에 고민 되었다. 내가 소심해졌나? 예전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냥 ‘저 사람은 원래 저래’ 하고 평가한 후, 의례적으로 만났을 것이다. 요리조리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솔직해서 직설적인 화법이 가끔 거슬려 불편할 때가 있다.
그런 태도로 다른 누군가에게도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겠지? 안타까움이 일면서 품성 좋은 그를 돕고 싶었다. 아니, 그 도움이라는 것도 오만함일 수도 있겠다.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도 좀 더 나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SAFE(Stop, Accept, Face, & Express, 멈춰 바라보며, 수용해 인식하고, 직면하고 느끼며 빠져나와 표현하라)’라는 내면의 작업으로 나를 구해내기 시작했다.
1. Stop & See: 멈추고 바라보라.
그와의 대화에서 그래도 내가 잘 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감정적인 대응, 자동 반응을 하지 않고 일단 멈추었다는 점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에게 로켓발사를 했겠지. 감정 섞인 고음이나 위협적인 저음으로 “당신이 믿는 종교는 뭐가 잘 났냐?”는 식으로 공격했을 터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감정의 파문에 휩쓸리지 않고 ‘멈추었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무엇을 바라보았나? 그가 말을 할 때 내가 느끼는 몸과 마음이다. 답답해진 가슴과 조여오는 목구멍 등의 신체 감각과 뜨거워진 감정, 뱉어 내고 싶은 생각을 판단 없이 보았다. 그저 내 몸과 마음에 일어난 현상을 바라보며 상대에게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2. Accept & Aware: 수용하고 인식하라.
무엇을 수용해야 하나? 내게 일어난 상황과 경험을 수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수용은 내게 일어난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가 내게 자극을 해서 내가 기분이 나빠졌는데, 왜 내 책임이란 말인가? 그래서 인식하기가 필요하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저절로 일어나지만, 어떤 선택을 하여 반응할지는 내 책임이다. 결국 내가 생각하고 믿는 방식에 따라 나는 기분이 상한 것이다. L님이 나에게 거친 발언을 했다손 치더라도 △내 마음 그릇이 넓거나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든지 △L님의 인간성이나 태도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내가 그렇게 가슴을 끓였을까?
솔직히, 내 감정의 책임을 내가 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자꾸만 그를, 또는 나를 비난하는 마음을 인식하면서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라며 나의 내면의 비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참을 수용해 주었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나를 괴롭히는 생각과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런 후에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3. Face & Feel: 직면하고 느껴라.
이 단계에서 나는 나의 신념과 내가 사고하는 패턴, 욕구들을 보았다.
L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생각을 할 때 느껴지는 편안함으로 내 말은 동의해주어야 한다는 신념 등이 얼키설키 엮여 있었다. 나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상대의 말과 행동에 기분 나빠지는 나를 직면하며 그런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았다. 유아적인 내 모습에 얼굴도 빨개지고, 피식 웃음도 나왔다. 여유가 생기자 L님의 입장에서 다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분명 나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안하게 신뢰하는 사이이니 그냥 자신이 가진 생각을 툭하고 던졌을 뿐이었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말을 그에게 전할까? 현명하고 지혜롭게 전해서 그와 내가 상생하는 길은? 나와 그의 입장을 여러 번 오가며 생각을 정리하자, 소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4. Exit & Express: 빠져나와 표현하라.
‘굳이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관계가 좋게 나아가길 바라는 나로서, 또한 내 감정에 책임지기로 했기에 표현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일 때문에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 얘기를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간이 포착되자, 나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새해 첫날 신부님과 성당 미사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하셨지요?” 그는 금시초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며 들었다.
“선생님 말씀 듣고, 솔직히 서운하더라구요. 막 따지고 싶은 충동도 있었구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제 마음 밑에는 선생님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해주기 바라는 마음, 내 종교와 나를 동일시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종교, 정치 얘기는 수준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아직 제가 미성숙했던 것 같아요.”
그는 약간 미안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사과 받으려고 이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선생님과 이 일로 성장하려고 꺼낸 거예요. 만약, 제가 ‘우리 성당은 의식과 교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할 때 선생님께서 ‘그렇구나. 우리 교회는 목사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데 각자 장단점이 있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좀더 나았겠지요. 하지만, 이것도 제 욕심입니다. 제 감정은 제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어쨌든, 우리 대화가 잘 흘러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위해 제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말씀드렸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L님은 무척 고마워했다.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같은 실수를 어딘가에서 또 반복하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겠다며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해주었다. 종교, 정치 등 가치가 반영된 민감한 주제는 정말 잘 다뤄야하는데 자신만이 옳다는 편협한 사고에 대한 성찰도 했다. 거듭 감사인사를 하는 L님에게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앞으로 우리는 더 넓고 깊게 열린 관계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3년차 팬더믹 상황은 우리 삶을 민감하게 만들고 있다. 사소한 의견 충돌로 감정이 쉽게 들끓으며 타인과 부딪치기 쉽다. 그럴 때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아닌 척하거나, 침묵하며 외면하기 쉽다. 상황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근본원인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계속 같은 문제로 자신과 타인을 갉아 먹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나와 상대를 마주하면서 감정과 상황에 책임지는 주체적인 자아,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며 관계의 주인이 되면 올 한해 얼마나 멋질까?
물론 쉽지 않다. 쉽지 않기에 그만큼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나를 안전하게 하는 ‘SAFE 훈련’을 자주 하길 바란다. SAFE 훈련을 통해 스스로 변할 수 있고, 나와 남, 우라 모두를 함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구하고, 타인과 신나게 더불어 사는 SAFE를 습관 삼아 임인년 호랑이처럼 활기차게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