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 대학 어디로②] 학생들의 실천적 역량 어떻게 키울지 고민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아시아엔=강준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기획처장 역임] 첨단은 물질의 뾰족한 끝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첨단의 과학기술은 인간을 날카롭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 문명사적 전환기를 가장 첨예하게 맞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교양교육은 어떤 인재를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글로벌 인재, 창의적 인재, 도전적 인재, 공감형 인재, 융합형 인재 등 시대적 요구와 관점에 따라 형용사는 달라진다. 그러나 인재상을 어떻게 표현하든 대학이 길러내야 할 인재는 결국 사유, 성찰, 실천이라는 3가지 본질적인 역량으로 수렴된다.

대학은 먼저 사유하는(reason) 인간을 키워야 한다. 사유하는 인간은 고차원적 사고능력을 충분히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성을 활용하는 능력은 1차원적 단순 암기에서부터 논리적 분석력을 거쳐 창조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사회의 변화속도와 지식창출 및 유통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던 과거에는 정제된 지식을 빨리 그리고 많이 습득한 후, 남보다 먼저 정형화된 문제를 풀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식의 총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지식의 유통기한은 점점 짧아지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단순 지적노동을 대체할 미래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능력이 요구된다. 정답이 없고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넓고 깊은 시야를 가지고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유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논리적 분석능력과 비판능력은 물론이고, 질문하는 능력, 문제를 찾고 정의하는 능력,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는 능력, 편집하고 융합하는 능력, 그리고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성을 다차원적이고 고차원적으로 활용하는 역량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1차원적 이성 능력을 똑똑한 인재의 자질로 간주하지는 않는가.

둘째 성찰하는(reflect) 인간을 길러야 한다. 성찰하는 인간은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가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이유도 성찰이 인간이 갖춰야 할 중요한 자질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성찰은 기본적으로 이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성찰은 이성과 달리 반드시 양심과 함께 작동해야 한다. 즉 양심이 작동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성찰이 가능하다. 이성과 양심의 결합이 도덕과 윤리를 잉태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 그리고 배려를 낳는다.

이성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특성이라면 양심은 인간을 온전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나누는 기준이다. 양심은 이성적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할지 결정하는 나침반과 같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줄 알며, 타인과 상생하고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바로 양심이다. 우리의 대학은 학생들을 성찰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우고 있는가.

셋째 실천하는(respond)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실천하는 인간은 사유와 성찰의 결과를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 행동이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결국, 실천이란 사유와 성찰에 몸으로 반응하는(respond)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에 우리의 몸이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이 곧 실천이다.

우리가 책임감이라고 번역하는 responsibility는 이러한 몸의 반응능력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과 세상의 진정한 변화는 사유와 성찰의 결과를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러한 실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용기, 체력, 도전정신, 인내, 소통능력, 리더십 등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대학은 주로 사유하는 인간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것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이성적 능력을 키우면 개인의 삶이 고양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제 우리 대학은 학생들의 실천적 역량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보다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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