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삼봉 정도전과 수양대군, 그리고 박근혜 사면

도담삼봉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수한다. 남한강 유역에 제천에 도담삼봉이 있다. 정도전의 호가 삼봉이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설계도를 그린 사람이다. 대표적인 신권주의자다. 이성계가 강씨 소생의 막내 방석을 세자로 내린 것이 노욕에 판단이 흐려졌던가 했는데 그 과정에 정도전이 작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왕건과 신권이 대립하였으나 진, 한 등 제국이 형성된 진 이후에 송, 명 이후에는 황제 권력이 강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선 이후에는 신권이 특히 강해졌다. 신하들이 힘을 합쳐 ‘아니되옵니다’ 하면 되는 것이 없었다.

태조가 정실인 한씨의 소생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을 놓아두고 후취인 강씨 소생의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것은 노인의 망녕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기에는 정도전의 개입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설계자다. 경복궁, 숭례문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막강한 건국 수훈인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밀었다.

이는 허약한 방석을 세워 자기가 좌우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스물 일곱 왕 가운데 適長子는 아홉에 지나지 않는다. 고종도 둘째 아들이었다. 왕은 세자가 자동 승계하다보니 역량에 차이가 있었다.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같은 탁월한 왕이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대과는 3년마다의 식년시에 33인만을 뽑았는데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정도전은 대표적인 신권주의자였다.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을 세우고 폐립한 선비들은 신통치 않은 임금을 바꾸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았다. 특히 왜구와 여진족을 물리친 이성계의 군권을 바탕으로 하나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신진사류에게는 이들이 대단치 않게 보였을 것이다.

전주 이씨의 왕업을 창건한 데 제일 큰 공이 있는 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했다. 연산군을 내친 것이 중종반정이요 광해군을 내친 것이 인조반정이다. 이때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은 대비였다. 자연히 대비의 친정, 즉 외척의 힘이 커졌다. 남은 전주 이씨의 왕손은 성명을 보존하는데 바빴다. 흥선 대원군이 落拓不遇 하다가 권력을 잡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다시 민비의 여흥 민씨에게 권력을 뺏기는 것도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태종은 세종에 성군이 되라고 당부하면서 장애가 될 만한 처족을 모조리 제거했다. 처족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물론 세종의 처족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 죄 값이 큰 것을 알았다. 세조가 지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가 보니 토굴 속에 18나한이 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었다. 세조가 18나한상을 만들고 절을 지어 수종사水鍾寺라 하였다. 많은 사람을 죽인 죄 값을 치르고 후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져 있다.

권력투쟁에 온정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다. 자유당 시대 조봉암 사형과 박정희 시대 사형 판결을 내리고 다음날 집행한 인혁당 사건은 두고 길이 남는다. 

문재인 박근혜(왼쪽부터)

31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4년 9개월만에 사면 복권된다. 정치적 계산을 넘어 통합의 단초가 되길 바라는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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