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성쌍둥이 ‘태일이’와 ‘무녀도’···“단언컨대 좀처럼 조우하기 쉽지 않은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한국 토종 애니메이션 <태일이>와 <무녀도>

[아시아엔=전찬일 영화비평가,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장] 퀴즈로 시작하자. 국산 실사 ‘천만 영화’는 과연 몇 편일까? 2003년 12월 24일 개봉해 근 두달만인 2004년 2월 19일 한국 영화사상 첫번째로 천만 고지를 돌파한 <실미도>(강우석 감독)를 필두로 2019년 7월 기준 천만 영화에 등극한 봉준호의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총 19편이다. 그렇다면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적은 어떨까?

놀라지 마시라. 1천만은커녕 1백만선을 넘은 영화가 두 편에 지나지 않는다. 220여만명으로 2011년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4위에 오른 <마당을 나온 암탉>(오성윤 감독)과, 105만명으로 2012년 흥행순위 31위에 자리하고 있는 <점박이 : 한반도의 공룡3D>(한상호)다.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의 경우도, 극장판은 1백만선조차 돌파하질 못했다. 기획단계부터 세계시장을 겨냥 제작돼 2003년 EBS에서 첫 방송된 이후 작년 11월 7기가 방영될 때까지 전 세계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뽀통령’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K-애니메이션의 선두주자. 가령 뽀로로 10주년 기념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도 81만에 그쳤으며, 2019년 선보인 <보물섬 대모험>도 76만명에 불과했다. 도대체 극장용 애니영화와 실사영화 사이의 이 크디큰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나라에는 그만큼 애니 관객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사영화와 비교해 관객 수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은 사실이긴 해도···. <아바타>(2009)부터 <알라딘>(2019)까지 총 8편의 외국산 천만 영화 중 두 편이 애니메이션 아닌가. <겨울왕국>(2013)과 <겨울왕국 2>(2019)이다. 관건은 관객의 부재는 아닌 셈이다. 지난 12월 1일 개봉된 <태일이>(홍준표 감독)와 그 전 주에 선보인 <무녀도>(안재훈)의 각별한 선전을 바랐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수입산 아닌 우리네 토종 애니를 향한 대중 관객들의 관심‧애정을 어느 정도라도 일으키길 염원했다고 할까. 두 영화의 제재가 워낙 육중한 터라 흥행을 향한 큰 기대를 품진 않았어도···.

태일이

내 염원은 충족되지 않았다. <태일이>는 사전 특별시사 등을 통해 6만 가까운 티켓을 확보하고 개봉됐으나, 12월 14일을 기해 10만을 넘는 데 만족해야 했다. 2주간 4만여명가량을 동원한 건데, 코로나 시국인 데다 스크린이 최다 450여개에 최소 120여개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수치도 꽤 유의미하긴 하다. <무녀도>의 경우는 초라하다 못해 참담하다. 겨우 5천명 선에 근접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태일이>와 <무녀도>는 단언컨대 좀처럼 조우하기 쉽지 않은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라고.

제목이 가리키듯 <태일이>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을 외치며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던 23살 청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회성 휴먼드라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거니와, 영화를 보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자료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누구보다도 이타적이었던, 꿈 많고 감수성 풍부했던 청년 전태일은 경제성장이 만든 그림자 속에 고통받는 ‘노동자’가 있음을 외치기 위해 스스로 희망의 불꽃이 되었다”는 것을. “그가 떠나고 2주 뒤 청계피복노조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전태일 정신은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 나가 곳곳에서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태일이

물론 그 역시도 안다. 태일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뤄내고자 원했던 진정한 변화는 아직도 요원하며,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외침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라는 현실쯤은. 부끄럽게도 OECD 산업재해 사망률 1위(2021년 기준)요 연간 노동시간 4위(2020년)라지 않은가. 최근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황동혁)과 <지옥>(연상호), BTS, 그리고 봉준호의 <기생충>(2019) 등 ‘한류’의 대표적 주역들은 한결같이 그런 현실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졌지 않은가.

그럼에도 태일의 죽음 이후 ‘전태일 정신’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고 그 정신과 더불어 크고 작은 긍정적 변화들이 이뤄진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이 <태일이> 아닌가!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에 이어 또다시 노동운동사의 상징인 전태일을 스크린으로 불러와, 그가 그토록 꿈꾸던 ‘함께 사는 세상’을 현재의 관객들과 함께 그려내려는 기념비적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나서 지난해 저자 중 1인에게 선물 받아 완독한 <아, 전태일! – 그가 떠난 50년을 기리며>(안재성·이병훈·맹문재·박광수·윤중목 지음, 목선재) 중 ‘1부 전태일 약전略傳 – 전태일, 사랑의 생애 / 안재성’을 다시 읽었다. 눈물을 참아가며, 시험공부하듯 찬찬히.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전태일 그는 ‘위대한 보통사람’이요, 우리 같은 범인들은 도저히 살아내기 불가능했을 거대한 삶을 살다 새로운 생명을 향해 이 세상을 떠난 거인이었다!

영화에서건 위의 역저에서건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태일의 유언이다. “엄마는 이 아들을 이해할 수 있죠?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고 이해하실 겁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세요?” 그는 계속해 말한다.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저 대신 이루어 주세요···엄마, 정말로 하실 수가 있어요?···어머니! 저하고 약속을 한 겁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유언한다. “친구들아, 사람이란 뭐니 뭐니 해도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네···절대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주게.”

주지하다시피 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대의를 실천하며 살다 2011년 9월 아들을 만나러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적잖은 친구들의 삶도 그랬을 테다. ‘전태일 이후’를 그리진 않아도, <태일이>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한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당시의 청계천 묘사 등에서 시대적 고증을 충실히 한 것도 주목감이다. 1985년생 감독답게 비판적 거리를 견지하며, 최루성으로 치닫지 않은 선택도 상찬감이다. 이지수의 음악도 시종 귀를 잡아끌면서, 영상과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보완해준다.

그럼에도 그 시대를 살았던 환갑의 중년인 내게 <태일이>는 감동적이되 지나치게 절제를 했으며, 그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의 젊은 관객층을 의식해서일까, 투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했었던 태일의 외모를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잘 생기고 멋지게’(Hansome & Cool) 구현한 것도 다소 거슬린다(면 과도한 반응일까?). 전태일의 아름다움은 내면적 경지이지 외연적 차원은 아니지 않은가. 혹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Japanimation)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살짝 드는 것은 그래서다. 비단 그만 그럴까만 싶기는 해도···.

무녀도

토속적 톤 앤 매너 등에서 <무녀도>는 <태일이>와는 또 다른 의미와 재미를 선사한다.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첫선을 보인 뒤 2020년 제44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2021년 제3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개막작 등으로 화제를 모아온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다. 1998년 창립 후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운영해온 안재훈 감독이, <소중한 날의 꿈>(2011)과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소나기>(2017)에 이어 네번째로 빚어낸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한국 단편문학 프로젝트 대단원 작품이다. 김동리의 동명 단편소설 <무녀도>를 원작으로 빚어진 영화는, 영험한 무녀 모화, 어릴 적 절에 보내진 뒤 소식이 끊겼다 기독교도가 되어 돌아온 아들 욱이, 그리고 열병 끝에 청력을 잃게 된 딸 낭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BIFF 프로그램 노트도 전하듯, 무속신앙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한국의 토속문화와 새로 유입된 서양문물 간의 갈등을 대변한다. 그 갈등이 결국 한 가족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비극을 다룬 이야기는 한국적 색채를 기반으로 한 아름다운 그림과 비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동적인 인물의 움직임으로 시각화됐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유럽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먼저 주목한 화제의 프로젝트로, 뮤지컬 배우 소냐와 김다현이 모화와 욱이로 출연하며, 신비한 목소리의 장원영이 화자로 등장하여 매력을 더한다.

무녀도 

<무녀도>는 사실 ‘복숭아꽃’부터 ‘세상은 어디로 가나’, ‘너는 알고 있니’, ‘죄와 벌’ 등을 거쳐 ‘떠나가네’로 이어지는 8곡의 뮤지컬 넘버만으로도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작으로 손색없다. 원색의 화려한 색감과 서정성 가득한 작화며, 원작의 맛을 충실히 소화해낸 각색의 맛 또한 수작에 값한다.

문득 밀려드는 의문. 대체 왜 안재훈 감독은 10년 걸려 완성했다는 첫 장편 애니 <소중한 날의 꿈> 이후 한국 유명 단편들을 영상화하는데 매달려 온 것일까? “이성異性보다 먼저 사랑했던 문학작품을 아무도 애니로 만들어주질 않아서”였단다. “뷰티풀(beautiful), 프리티(pretty)로는 안 되는, 우리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있어요. 아련하다, 아릿하다 같은 감정들요. 시골 냇가, 돌로 놓은 징검다리, 풀꽃과 갈대숲···무슨 색깔이라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풍경들을 그리죠.”(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226) 그 얼마나 숭고한 명분인가. <무녀도>와 <태일이>가 이란성쌍둥이인 이유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시도는 계속되지 않는다. <무녀도>의 처참한 흥행 스코어가 보여주듯, 그도 지쳤다고 할까. <무녀도>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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