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17] 왜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는 몇 안됐을까?

‘정원에서의 아침식사'(Breakfast in the Garden), 지우세페 드 니티스(Giuseppe De Nittis), 1883-1884, 81 x 117

인상주의 화가들과 작품을 살펴보다가 조금 이상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회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막중한 비중으로 볼 때 인상파 화가들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우세페 드 니티스(Giuseppe De Nittis), 엘리세우 비스콘티(Eliseu Visconti), 그리고 페데리코 잔도메네기(Federico Zandomeneghi) 정도다.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흐름과 이어지는 근대 회화, 나아가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세계 회화의 기본을 만들었던 이탈리아에 왜 인상주의 화가들이 드문 것일까.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거장들을 본받고자 이를 따랐던 제도까지 있었다.

예를 들어, 최고의 화가 등용문이었던 ’살롱(le Salon)‘에서 1등을 하면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보내주었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이루어진 시스템이었다.

그리하여 살롱 1등상의 별명이 바로 로마대상(Prix de Rome)이었고, 이런 제도는 당시 건축과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살롱에 의하여 고전주의이자 아카데미즘이라는 굳건한 파벌과 제도가 성립되면서 그런 패거리에 들지 못하던 화가들의 고뇌는 깊어만 갔고 결국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나의 운동이 만들어진다. 그게 바로 인상주의(Impressionism)였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굳건한 회화의 전통에 과감하고 막강하게 반기를 들었던 인상주의에 대하여 이탈리아 회화계에서 좋게 봤을 리 없었다.

알다시피 인상주의는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심지어 미국과 스칸디나비아에도 이어졌다.

따라서 대표적인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였던 지우세페 드 니티스(1846~1884)에 대하여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아풀리아(Apulia) 지방의 바를레타(Barletta) 출신으로, 지오반니 바티스타 칼로(Giovanni Battista Calò)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운 그는 나폴리의 정규 미술학교(Instituto di Belle Arti)로 진학했다. 하지만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퇴교 조치를 당한 후 마음에 맞으면서 실력 있는 친구들과 함께 나폴리와 피렌체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1867년, 파리로 진출하여 미술상 아돌프 구필(Adolphe Goupil)이 만들었던 상업적 그림제작소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살롱에서 이루어지던 전시를 눈여겨본 그는 관련 그림을 그리면 뭔가 그림이 잘 팔릴 것 같은 생각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 풍경과 같은 자연을 그리면서 지냈다.

1872년 다시 파리로 간 그는 구필의 제작소에서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지만 대신 노력을 기울여 1874년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아울러 그는 같은 해 사진작가 나다르(Nadar)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초대 받았다.

당시 초대는 바로 이탈리아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그곳 출신 친구들(Telemaco Signorini, Giovanni Boldini and Federico Zandomeneghi)과 잘 알고 지내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로부터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출품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하여 결국 전시에는 함께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이루어졌던 개인적인 런던 여행은 그가 인상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875년, 그는 파스텔을 자신의 그림 표현에서 중요한 기법으로 적용하면서 점차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다시 파리로 온 이후 그의 집은 문학인이자 평론가인 드 공쿠르(De Goncourt), 졸라(Emile Zola), 루이 에드몽 듀렁티(Louis Edmond Duranty) 및 인상파 화가 마네(E. Manet) 등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출신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사랑방이 되었다.

그는 파스텔 기법을 발전시켜 커다란 캔버스에는 물론 일본 우키요에 스타일의 3폭병풍 방식(triptych)의 작품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는 1878년 열린 국제엑스포전(Exposition Universelle)에 12점의 회화를 출품하여 금메달을 수상한 후 레종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을 받았다.

38세 되던 1884년, 생-제르망-앙레(Saint-Germain-en-Laye)에서 쓰러진 그는 뇌졸중이 되었고, 이때 파리 출신의 부인(Léontine Lucile Gruvelle)은 작품들을 그의 이탈리아 고향 마을에 기증했다. 그곳을 대표하는 화가가 된 그의 작품들이 현재의 바를레타 화랑 컬렉션이 되었다.

니티스의 다른 작품들은 파리의 오르세미술관(Musée d’Orsay), 런던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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