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송’···”삶도 그대로 죽음도 그대로, 시를 읊든 말든”

성철스님

[아시아엔=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중국 당송시대에 꽃피운 참선불교, 선불교인 선종(禪宗)은 초기불교와 명상의 주제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초기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의 감, 지각기관의 감각과 지각활동의 관찰 분석을 통해 ‘그대로 있지 않음’(無常)과 ‘나 없음’(無我)을 체득해서 ‘다시남’(輪廻) ‘없음 곧 열반’(涅槃)이 지상최고의 목표였다.

양(梁)대와 수(隋)대를 거친 당송시대의 선종승려들은 초기와는 다르게 말씀 또는 개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맘의 언어(맘짓), 입의 언어(말짓), 몸의 언어(몸짓)의 제 뜻 곧 개념파악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서도 그러하고 내 밖에서도 그러하니 안팎에서 모두 그러했다.

더욱 중요하게 느낀 것은 밖에서였다. 수십의 이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에서는 특히 말이 가진 여러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윗사람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구족이 멸문지화를 입기도 했다. 제대로 알면 삼족이 번성하는 혜택을 입었다.

수행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던 참선불교 곧 선종의 수행은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을 관하되 묵묵히 관하는 묵조선(黙照禪)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천변만화하는 심리와 자연을 활발발(活潑潑)하게 수행과 전법교화 곧 수행지도에 활용할 수 있어서 적극적이고도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가 주류인 한국불교에서는 종합적인 쓰임새가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흐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뒤에 받은 이들은 여럿을 비교, 분석, 추론을 통해 판단하고 고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는 효율과 통섭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글과 말 안에 운율이 있는 것은 아주 좋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의 말이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운율은 몇 개 민족의 말에서 잘 쓰이고 있다. 인도, 중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많지 않은 나라의 말에서는 같은 글자로 썼어도 높낮이 길이, 꺾임 등이 달라지면 뜻도 아주 다르게 된다. 맛으로 따지자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의 트로트 꺾임이 다른 것쯤으로 느낀다면 비슷할 것이다.

불교 수행승이 돌아가실 때 남긴다는 열반송이 사람들에게 많은 느낌을 준다. 이름이 고타마싯다르타인 부처님(석가모니)도 태어났을 때, 깨달았을 때, 돌아가실 때 뭐라고 읊었다는 것이 기록에 나온다. 탄생게(송), 오도게(송), 열반게(송)이 그것이다.

탄생게와 오도게는 탄생하고 오도한 뒤에 읊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열반게는 그 전에만 가능하다 탄생게는 스스로 읊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열반게는 부처님처럼 열반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당부의 말씀이다. 당부의 말씀인데도 운율이 있는 민족의 말씀은 그대로 시가 된다.

열반하기 전에 스스로 또는 누군가가 게송을 지어야 하는 것으로. 열반하시기 전의 당부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얼핏 보기에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말만을 남기거나 재미있어 보이는 게송을 지은 경우가 좀 있다.

그 뿌리는 간화선 참선법을 확립해 대중화시킨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선사다. 그는 <벽암록>(碧巖錄)의 지은이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의 제자였다. 그가 남긴 열반송은 줄 띄어쓰기를 하면 시처럼 보이지만 말씀이다. “삶도 그대로 죽음도 그대로인데 시를 읊든 말든 거기 무슨 뜻이 크겠나”(生也只恁麽 死也只恁麽 有偈與無偈 是甚麽熱大)

뜻을 크게 두지 말라는 당부로 보아 그 동네에서도 말들이 있었던 게다. 말씀이라고 해도 시(詩)다. 시는 대접말씀(侍語)이기에 누구나 삶이 어려웠음을 살펴서 ‘잘 가심’(善逝)을 축복하는 마음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