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의 최고 실천 ‘무소유의 삶’
[아시아엔=법현스님 열린선원 원장] 세상 모든 존재가 다 자신의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성직자(聖職者)임을 부정(?)하고 수행자(修行者)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가 불교의 출가자 곧 승려다.
수행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신과 자신의 삶이 우주 자연의 이치에 걸맞게 자연스러운 삶이고자 하는 희구가 넘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 윤리적 삶이 자신의 것을 갖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저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질 것이 없다(無所 有)는 것, 가질 자가 없다는 것, 존재(有)가 없음(無)을 알아야만 가질 자도, 가질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승려로서 자연스러운 삶의 최고 실천도인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한국사회에서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재물이나 자리를 두고 다투거나 승려의 계율뿐 아니라 사회의 통념과 법에서조차 금하는 것을 자행해 물의를 빚기도 한다.
출가승려라 할지라도 수행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
부처님께서는 기적을 바라거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참됨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길이 아니라 했다.
내 주장이, 내 권력이, 내 재물이, 내 명예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바로 소유의식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다.
뿌리는 어리석음(無明)에 닿아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부분이요, 전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더 가지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있는 동안 사용하다가 돌려주는 것이 물질이요 명예다.
수행자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이면 족하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한다. 삼의일발로 최소한의 음식만을 먹고자 하는 이에게 분명 행복이 있다.
옛날에 그랬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많이 가지면 안 된다. 많이 가진 것 부끄러운 줄 모르면 더 안 된다. 단체가 가져서 일하는 것을 뭐라 하지 않는다. 그 뒤에 숨겨 놓는 것을 뭐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