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만해대상 수상자, “그들 땀과 눈물 있어 이 땅 숨쉴 만해”

12일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 제25회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곽채기 만해축전추진위원장(바렌보임 수상 대리), 보각스님, 김하종 신부, 오정희 소설가,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왼쪽부터)

[아시아엔=이상기·민다혜 기자] “우리는 1999년부터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중동의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연주자가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대화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일에 많은 열정을 느끼고 있다. 만해대상 수상을 통해 음악과 예술 분야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평화대상 다니엘 바렌보임)

“1980년대 중반부터 36년간 제자들을 길러내고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 세월이 다 돼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후학들을 길러내는 일은 멈추었지만 현장에서의 실천은 계속할 것이다. 2500여 제자들이 좀 더 많은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도록 살피겠다.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다.”(실천대상 보각스님)

“이 상을 받기까지는 코로나 팬데믹 중에도 ‘안나의 집’이 아무런 사고 없이 현 상태를 유지하며 운영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시는 봉사자, 후원자와 직원 등 현장에 있는 의사선생님, 간호사선생님, 소방관, 경찰관 분들의 노고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감사드린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생활을 하면서도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의 나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삶이 행복하고 감사하다.”(실천대상 김하종 신부)

“희망과 욕망과 고통과 슬픔에 연대하는 문학과 문학하는 사람들의 도도한 흐름에 한 작은 존재로 함께 했다는 것이 새삼 기쁘고 벅찬 자부심을 준다. 준엄한 기상과 도저한 자존과 지극한 유정함으로 자유와 평화와 생명을 지향해가는 것, 그렇게 우리의 생을 높이 들어올리는 것, 그것이 문학의 중요한 소임임을 다시금 생각하며 감사하고 숙연한 마음이다.”(문예대상 소설가 오정희)

“문화예술은 사람들을 평화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쉼을 주어 다시 태어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문화예술은 사람들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람들 간에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도구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바랐던 평화를 문화예술을 통해 더욱 꽃피울 수 있도록 이 상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 정신에 평화를 주어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문화예술인으로서 변함없이 꾸준하게 노력하는 삶을 살겠다.”(문예대상 발레리나 강수진)

지난 12일 오후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 제25회 만해대상 수상자 소감이다. 올해 수상자는 △평화부문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실천부문 보각스님, 김하종 신부 △문예부문 오정희 소설가,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등이다.

만해대상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스님의 생명·평화·겨레사랑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제정됐으며,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달라이 라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 중국 작가 모옌, 시린 에바디(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 변호사 등이 수상됐다.

‘희망·극복’을 주제로 열린 올해 만해축전은 동국대와 강원도, 인제군, 조선일보,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윤성이 동국대 총장, 최상기 인제군수 등이 참석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고자 모든 행사에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적용해 50명 미만으로 참석자를 제한했다.

           제25회 만해대상 수상자와 제19회 유심작품상 수상자

다음은 이날 수상자들의 공적사항이다.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은 음악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왔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유대인 음악가인 바렌보임은 1999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영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와 손잡고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창단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 지역의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서 음악을 통해서 화합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유례 없는 악단이었다. 악단의 명칭은 독일의 문호 괴테가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고 집필한 ‘서동시집’에서 가져왔다.

바렌보임은 이 악단을 창단하면서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칼을 빼들 필요는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프로젝트”라며 “무지(無知)에 대항하는 기획”이라고 설명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무지로 인한 공포와 적대감이 줄어들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한 프로젝트였다.

첼리스트 요요마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 이들의 활동에 공감하는 세계적 음악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악단은 독일과 스페인 등 유럽 각국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첨예한 분쟁 지역으로 손꼽히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찾아가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이같은 공로로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2002년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2007년 바렌보임을 UN 평화특사로 임명했으며, 2016년에는 ‘문화적 상호이해를 위한 UN 국제 옹호자(Global Advovate)’로 임명하기도 했다.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대담집인 ‘평행과 역설’을 비롯해 바렌보임의 자서전 등 관련 저작들이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다.

공동 창설자인 사이드가 2003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악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2016년에는 독일 베를린에 ‘바렌보임 사이드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이스라엘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예술 교육을 시작했다. 예술 활동을 통한 상호 이해가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도록 안정적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스페인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첫번째 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19~20세기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서 일어난 유대인 탄압인 ‘포그롬(pogrom)’을 피해서 남미로 이주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피아니스트였던 양친에게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아홉 살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격찬을 받았던 음악 신동이다.

1975년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이후, 미국 시카고 심포니와 독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이탈리아 라스칼라 등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을 수 차례 연주하고 녹음한 거장으로 명성이 높다. 그래미상만 6차례 수상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에는 고국 이스라엘로 건너가서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등에서 연주할 만큼 애국심을 보였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보이는 모습에 점차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바렌보임은 2003년 인터뷰에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끔찍하고 전략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스라엘의 국가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민감한 국제 현안에 대해서도 언제나 열린 자세를 보이고 대화를 통한 문화적 교류를 강조하는 실천적 예술가다. 2007년 괴테 메달과 프랑스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2011년 영국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 보각 스님

보각 스님은 “거지들에게 빵 나눠주는 걸 왜 하느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1970년대 조계종 스님 중 처음으로 대학(상지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으며 1985년부터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해 2019년 정년퇴임까지 길러낸 제자가 1000여명에 이른다. 전국의 불교 사회복지시설 대표의 절반 이상이 그의 제자다.

스님이 사회복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속가 어머니의 지극한 이웃사랑을 보고 배운 덕분이다. 그가 고향(나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던 날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은 어머니의 자비심을 잘 보여준다. 추운 겨울날 한 거지 여성이 아기를 업고 버스에 오르자 어머니는 보각 스님에게 대뜸 “얼른 내복 벗어라”고 했다. 어머니를 너무나 잘 아는 보각 스님은 대꾸 없이 그 자리에서 내복을 벗어 거지 아줌마에게 건넸다. 보각 스님의 은사인 천운 스님은 평소 “네 어머니만큼만 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광주 향림사에서 은사 천운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이 사찰은 허름한 ‘하꼬방’ 행색이었는데 아이들만 서른 명을 키우고 있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도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은사 스님은 이미 복지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운 스님은 이후로도 유치원, 어린이집, 신용협동조합,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등을 설립해 장애인과 노인, 아동보호 시설을 운영했다. 속가의 어머니와 출가해서 만난 은사가 모두 사회복지의 씨앗을 보각 스님에게 뿌려줬던 셈이다.

스님은 1985년부터 중앙승가대 교수로 재직하며 불교계에 사회복지 전공자를 양성하는 동시에 복지 현장에도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던 강원도 원주의 소쩍새 마을이다. 소쩍새마을은 1985년 ‘일력 스님’이라는 이가 고아, 장애인, 행려자 등을 돌보며 사는 시설로 알려지면서 엄청난 후원이 쏟아졌다. 그러나 1995년 시설 내에서 폭행과 학대 그리고 성폭력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줬다. ‘일력 스님’은 실제 승려도 아니었던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불교, 특히 조계종이 운영하는 시설로 알고 있었고, 불교계의 위상도 함께 추락했다. 일력이 해외로 도피한 후 소쩍새마을은 조계종 중앙승가대로 운영 주체가 넘어왔고, 보각스님은 이 마을을 정상화시켰다.

삼전종합사회복지관, 장애아동요양시설 상락원, 행복의집 등을 운영한 그는 2003년부터 경기 화성에 노인요양시설과 중증장애인시설, 비구니스님 요양시설 등을 관장하는 자제공덕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전체 9동의 건물에 어르신 200여명, 장애인 50여명, 비구니스님 20여명을 모시고 있다. 또 2016년엔 인도 쉬라바스티에 보광학교를 개교해 현지 어린이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2013년부터 이 학교 설립을 위해 건립기금 전액을 보시하고 매년 6000달러 이상의 장학금도 보내고 있다.

그는 중앙승가대 교수로 재직한 이후 30년간 30억원 가까이 기부했다. 시주가 많은 사찰의 주지를 맡은 적도 없는 그가 거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법문’이다. 20대 후반 조계사 소임을 맡던 시절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법문 잘 하는 스님’으로 소문났다. 지금도 수시로 사찰뿐 아니라 기업체 등에도 초청 받곤 한다. 어느 해인가는 부처님오신날 하루에 일곱 번 법문을 한 적도 있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이동하면서 법문을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법문을 하고 받은 사례금과 교수 월급, 원고료, 저서 인세 등을 모두 저축해 기부하는 것이다.

2019년 5월 중앙승가대 퇴임 때에도 그는 승가교육발전기금 3000만원을 내놓았다. 2014년부터 5년 동안은 매년 1억원씩 중앙승가대에 교육발전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사회복지에 대해 그는 “복지는 그 자리에서 검증받는 현장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는 “실천 없는 자비는 무자비와 같다” “부처님이 지금 시대에 오셨다면 사회복지사의 모습으로 출현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하종 신부

김하종(본명 본첸시오 보르도) 신부는 경기도 성남 노숙인들의 대부다. 김 신부는 매일 성남시 성남동성당 인근 ‘안나의 집’에서 500~600명 노숙인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기본적인 의료지원을 돕고 인문학 강좌까지 개설하고 있다. 가출청소년을 위한 쉼터도 운영하고 있다. 노숙인들과 가출 청소년들의 육신과 정신에 양식을 제공하는 사목활동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30년 전 오직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단신으로 한국에 온 이래 온몸을 던지고 있다.

김 신부는 이탈리아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소속 가톨릭 사제다. 1990년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뜻을 품고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그는 서강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어려운 곳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성남시였다. 처음엔 성남 신흥동 성당 보좌신부로서 지역의 사회복지 담당 수녀들을 따라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

그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였다. 실직한 가장들과 노숙인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는 모란시장 근처에서 뷔페식당을 운영하던 한 신자의 도움으로 노숙인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하던 급식은 수요가 넘치면서 성남동성당 구내의 가건물 창고를 이용한 매일 급식으로 바뀌었다. 하루 평균 550명분, 지금까지 연인원 200만명 이상이 안나의집에서 식사했다. 처음부터 그의 정신은 “불쌍하니까 밥 준다”가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김 신부가 노숙인들의 ‘자립’을 염두에 둔 것은 상담을 통해 이들이 노숙하게 된 배경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노숙인들의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려운 가정환경이 있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 가출한 어머니 등 가정문제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존감, 자신감이 결여되고 학력에 대한 열등감까지 겹쳐진 상태였다. ‘홈리스’는 결과일 뿐, ‘루트리스(rootless)’라는 깊은 원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김 신부는 노숙인들에게 밥을 주는 동시에 쉬운 종이봉투 접기라도 함께 할 것을 권한다. 가출 청소년들을 챙기는 이유도 미래의 홈리스를 막기 위해서다.

‘안나의 집’ 20여년은 기적의 역사였다. 20년간 하루 평균 550명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던 배경은 8000명에 이르는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나 진정한 원동력은 김 신부의 헌신과 봉사였다. 안나의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 짐을 나르고 있는 곱슬머리 외국인을 만나게 된다. 김하종 신부다. 그는 항상 짐 나르기부터 음식 조리와 배식까지 솔선수범한다.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은 이들의 후원과 자원봉사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2018년 성남동성당 앞에 새 집을 지어 이사한 것은 ‘큰 기적’이었다.

코로나19 사태는 안나의집 개설 후 최대의 위기였다. 자원봉사자는 줄고, 한 끼가 절실한 사람은 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적은 일어났다.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30~50명씩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었고 도시락으로 대체해 많게는 800명분씩 봉지에 싸서 배식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 사태 이후 그는 매일 밤 일기를 썼다. 275일 분량을 모아 낸 책이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이다.

코로나 사태로 폐쇄여론이 높았을 때 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이 사람들은 제 가족입니다. 선생님 가족 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버립니까? 아니죠? 더 많이 신경 쓰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분들한테 식사 드리면 건강해져서 바이러스에 덜 걸립니다. 사회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닫지 못합니다.’ 두려워서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이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근무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놀랍게도 이제까지 저와 우리 직원들, 자원봉사자들, 노숙인 친구들까지 한 명도 바이러스 걸리지 않았어요. 이거 기적이에요. 다른 말 없어요.”

김 신부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계획을 했으면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맡기면 다 이뤄집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걱정은 어려운 이웃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고 똑똑하고 복잡해요. 세계 어디나 그렇죠. 여기서 식사하는 분들은 그걸 못 따라가요. 돈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나눔과 배려를 배워야죠. 안나의집은 돈, 시간, 관심, 재능을 나누는 일반 사람들 덕에 꾸려갑니다.”

그는 호암상, 포니정 혁신상 등 그동안 받은 상금을 모두 안나의집에 썼다. “저는 대단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제 생활을 인도해 주셔서 생긴 기적일 뿐. 저는 봉사자입니다. 봉사하러 한국 왔어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낮 1시가 되면 앞치마를 두릅니다.”

김대건 신부의 ‘김’을 성(姓)으로 택하고, ‘하느님의 종’을 줄여 ‘하종’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은 김하종 신부는 ‘한국에 뼈를 묻겠다’며 사후 시신과 장기기증까지 했다. 그의 요즘 바람은 “시설 책임은 한국인에게 맡기고 나는 봉사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가 오정희

1947년 서울 출생인 오정희는 오늘의 한국문학에서 인간의 내면 탐구소설에 관한 한 선뜻 귀감으로 꼽히는 창작세계를 일구어왔다. 1968년 서라벌 예대 문창과 재학 중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이른 나이에 등단한 오정희는 서정적이면서 밀도 높은 문체의 미학을 빚어냈고, 한국사회의 이면에 숨은 보통 여성의 일상적 삶을 다루면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원과 심층을 섬광처럼 조명한 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1970년대 이후 여성 문학의 새 지평을 제시한 오정희는 신작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이상문학상(1979년), 동인문학상(1982년), 동서문학상(1996년), 오영수문학상(1996년) 등을 잇달아 수상했다. 독일어로 번역된 장편 ‘새’는 2003년 독일의 리베라투르 문학상을 받았다.

오정희는 1978년부터 강원도 춘천에 살면서 집필 활동을 계속해왔다. 작가는 춘천과 그 주변을 무대로 한 중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강원도의 전래 민담을 현대소설로 재구성한 책을 내기도 했다. 작가는 춘천을 창작의 텃밭으로 삼은 까닭을 밝힌 적도 있다. “외지인들은 춘천의 안개와 눈꽃, 도시를 둘러싼 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쉽게 그것들의 아름다움이나 아련한 분위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안개의 몽환과 눈꽃과 물의 아름다움이 드러내고 숨기는 것, 품고 있는 것들,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작가생활 50년을 넘긴 오정희는 여전히 비평과 연구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오정희 문학을 이렇게 평가했다. “오정희 소설은 구리거울에 새겨진 인생과 우주의 만화경이다. 어떤 이는 거기서 불안과 공포의 늪을 건너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선험적인 고향을 상실한 영혼들의 존재론적 심연을 응시한다. 일상적이고 제도적으로 자동화된 세상의 질서를 낯설면서도 날카롭게 해부하는 시선의 메스에 놀라기도 하고, 자기 안의 넋의 우주적 부활을 위한 닫힌 듯 열린 몽상에 동참하기도 한다. 의미를 소진한 죽음의 동굴에서 긴장하면서 환멸의 풍경, 그 심연에서 새로운 문학적 우주를 지피는 작가의 현묘한 연금술에 경탄하기도 한다.”

오정희 소설은 낯익은 현실을 몽환적으로 낯설게 묘사함으로써 일상에 타성적인 독자의 의식을 일깨워 삶의 심층을 깨닫게 하고, 내면의 우주를 체험하게 한다. 그녀는 “묘사를 할 때 각별히 신경을 쓰는 부분이라면 빛이 비쳐 드러나는 부분보다는 가려져 그늘진 곳,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들, 어떤 경계의 어슴푸레함,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어가는 시공간의 찰나 등등 명백히 보이거나 설명되지 않는 것들입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정희 소설은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처럼 명시적 언어로 다룰 수 없는 비가시적 존재의 본질을 암시와 역설의 언어로 다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만해가 여린 여성의 음성으로 삶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했듯이, 오정희 소설은 사회적으로 약자의 처지에 놓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실의 모순과 실존의 불안을 침묵에 가까운 암시의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처럼 만해 문학의 전통을 계승해 온 작가는 백담사에서 주최한 만해 아카데미에서 문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정희는 오늘날 활동 중인 한국 여성 작가들에게 박완서(1931~2011)와 함께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쳐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완서 소설이 세태 묘사의 비법을 제시했다면, 오정희 소설은 내면 묘사의 모범을 보여줬다. 소설가 신경숙이 “오정희는 스무 살 이후로 내 마음에 박힌 푸른 보석이었다. 나도 그처럼 되리라 생각했다”고 회상한 것을 비롯해 숱한 여성 작가들이 오정희 소설을 습작의 교과서로 삼았다. 평론가 심진경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 문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오정희 소설이 있다”고 평가했다.

오정희는 등단 50주년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 “저에게는 박경리 선생님을 비롯한 선배 작가들이 있었다”라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여성 작가들이 주요 문학상을 휩쓰는 최근 현상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중간 지대로서 문학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문학이 성 대결의 극단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의 사회를 구현하도록 성찰하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강수진(1967~)은 1982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건너갔다. 1985년 스위스 로잔 발레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군무진(코르 드 발레)으로 입단하자마자 발목을 다쳐 1년이 다 가도록 솔로는커녕 군무(群舞)에도 끼기 어려웠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습을 택했다. 강수진은 하루에 토슈즈를 네 켤레(보통 2주일치 소비량)나 써서 물품 담당자로부터 “아껴 써달라”는 주의를 들었다. 옹이처럼 튀어나온 뼈, 뭉개진 발톱, 굳은살과 상처들. ‘세상에서 가장 못난 발’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 사진을 보며 삶에 자극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강수진은 1993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발레리나가 꿈꾸는 주역(줄리엣)을 맡았고 1997년 수석무용수가 됐다. 1999년에는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했다. 발레리나로는 환갑이라는 마흔 살이 넘어 은퇴 시기를 물을 때마다 그녀는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을 정도로 체력은 문제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강수진에게 가장 엄격한 비평가는 강수진이에요. 스스로 에너지가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그날로 내려옵니다. 발레는 몸으로만 하는 건 아니고 정신으로도 하니까 아무리 아파도 즐거워요. 나한테 중요한 건 오늘이에요.”

2013년 그녀가 펴낸 자서전은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사람들은 기똥찬 성공 비결을 듣고 싶어하지만 강수진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멀리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 똑같은 일과를 되풀이하면서도 조금 발전했다고 느끼면 만족해요. 강수진의 경쟁자는 늘 ‘어제의 강수진’입니다.”

그녀는 무대 맨 뒷줄부터 주어진 이름 없는 배역을 열심히 해 예술감독 눈에 들었고 한 계단씩 승급해서 결국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무용수다. 전성기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은 1999년이 아니었다. 강수진은 그 상을 받자마자 정강이뼈 골절로 1년 넘게 쉬었다. “사람 일은 불공평하면서도 공평하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무엇보다 발레단에서 군무를 오래 춘 것에 감사해요.”

이 발레리나는 201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올린 ‘오네긴’을 끝으로 토슈즈를 벗었다. 강수진의 퇴장은 한 시대가 저문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한국 발레 역사에서 누구보다 먼저 세계적으로 사랑 받은 무용수다.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 박세은,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 김기민 등은 모두 강수진을 동경한 ‘강수진 키즈’였다.

은퇴하기 전 “발레라는 ‘행복한 스트레스(good stress)’를 내려놓고 무대 밖의 인생을 음미하고 싶다”던 강수진은 현재 국립발레단장(임기 3년)을 이끌고 있다. 단원과 스태프가 140명에 이르는 조직이다. 그녀는 다음 세대에게 기술뿐만 아니라 표현과 정서 등 발레 DNA를 전수하는 임무에 몰입했고 행정가로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역대 국립발레단장 중 처음으로 3연임에 성공했다. ‘무브먼트 시리즈’로 단원들의 안무 역량을 강화했고, 클래식부터 모던발레까지 레퍼토리를 확장했다는 평을 받는다.

국립발레단은 국내 발레의 대중화라는 의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찾아가는 지역공연’ ‘찾아가는 발레교실’ 등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다양한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해외로도 활동 범위를 넓혀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올리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강수진은 발레 천재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겨내고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성장했다. 독창성이 가미된 표현력과 관객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는 모두 그 노력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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