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달러의 미래
[아시아엔=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코트라 밀라노 전 관장, <유대인이야기> <돈의 인문학> 등 저자] 1990년대 초부터 정부나 중앙기관으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사이퍼펑크 운동’에 가담한 암호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터넷이 가져올 빅브라더 사회를 경계하며 특히 돈 거래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거대 달러통화 기득세력에 도전하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세계화폐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 일환으로 추적 불가능한 탈중앙형 암호화폐를 개발해 익명으로 발표했다.
케인즈의 세계화폐
사실 세계화폐에 대한 생각을 한 사람은 비트코인을 만든 암호학자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미 세계화폐의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케인즈는 브래튼우즈회의에서 그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달러 체제에 대항하는 세계화폐 ‘방코르’와 이를 청산해줄 ‘국제청산동맹’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계 각국이 무역에서 각국 통화를 사용하지 말고, 이 세계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케인즈가 세계화폐를 주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통상분쟁과 환율문제로 3차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케인즈의 생각은 “세계화폐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전이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달러가 기축통화일 경우, 미국 내에서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면 경제위기는 전 세계로 전이되지만 세계화폐를 활용할 경우, 경제위기의 전이는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게 케인즈 생각이었다.
케인즈는 자본주의 경제의 화신처럼 회자되지만 그는 사실 사회주의 경제학자에 더 가까웠다. 그는 생전에 이자율의 점진적 인하로 금융자산 불로소득 생활자들의 안락사를 요구했다.
국제결제은행, 각국 중앙은행에 “암호화폐 준비하라” 권장
기축통화 달러를 주도하는 기존 금융자본은 암호화폐의 달러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암호화폐기술 만큼은 그들에게도 매우 유용함을 알아차렸다.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은 “암호화폐시장의 급성장이 금융시스템 안정을 해칠 위험이 있는 만큼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의 특성을 파악하고 직접 발행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국제결제은행이 이렇게 권고한 이유는 기술혁신의 대세를 거역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많은 중앙은행들이 탈중앙형 암호화폐의 기술을 모방하여 추적 가능한 중앙형 암호화폐 이른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디지털화폐 등장
이렇게 해서 암호화폐가 화폐의 본원적 기능을 미처 완비하지 못한 틈을 타 민간 섹터의 스테이블 코인들과 각국 중앙은행의 중앙집권형 디지털화폐가 먼저 시장을 장악할 준비를 하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2019년 페이스북의 ‘리브라 백서’ 발표 △JP모건체이스은행의 ‘JPM코인’ 발표 △2020년 중국 중앙은행의 디지털위안화 테스트 시작 등으로 세계는 지금 민간 스테이블 코인과 각국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CBDC)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추적 불가능한 분산형 암호화폐와 달리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디지털화폐다.
주요 국가들의 디지털화폐 추진
유럽 각국 중앙은행은 현재 디지털화폐를 경쟁적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특히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중앙은행이 적극적이다. 마크 카니 전 영란은행 총재는 “암호화폐는 미래 금융부문의 잠재적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2019년 8월 미국 잭슨홀 회의에서도 마크 카니 총재는 “미 달러의 지배적 지위가 글로벌 경제 안정성을 해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달러를 대체할 화폐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기축통화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다.
카니 전 총재는 “미국은 국제무역에서 10%, 글로벌경제 생산량에서 15%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무역거래 중 절반과 글로벌증권 발행 중 3분의 2가 달러를 통해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달러의 과수요가 글로벌 금융안정을 해친다는 게 카니 총재의 지적이다. 그는 골드만삭스 출신이라 누구보다 월스트리트 사정에 해박한 사람이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세계 60여개 중앙은행 가운데 70%가 디지털화폐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2년부터 한국은행이 디지털화폐 테스트를 시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중앙은행, 암호화폐 테스트 중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디지털화폐 유통 시험에 이미 착수해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때까지 진행할 예정이라고 공식 입장을 냈다. 미국 달러 중심의 글로벌 통화체제에서 위안화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될 지 주목된다. 인민은행은 “현재 선전, 쑤저우, 슝안신구, 청두와 향후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장소에서 폐쇄식 테스트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동계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개최 예정지에서 시험을 실시한다고 밝혀 개막행사에 맞춰 디지털화폐를 상용화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디지털화폐 그림 속에도 실물화폐처럼 발행연도 등이 포함된 고유번호가 들어가 있다. 이는 추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현재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알리페이처럼 QR코드를 스캔해 돈을 지불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송금 기능도 있다. 또 스마트폰 2대를 서로 맞대는 ‘부딪치기 기능’도 있는데 이는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지 않은 곳에서도 근거리 통신기술을 활용해 서로 돈을 주고받는 기능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부딪치기 기능은 특히 아직 인터넷이 접속되지 않는 아프리카 등 빈곤 지역의 경제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화폐시스템이 될 수 있다. 농업은행은 인민은행의 지침에 따라 일부 도시에서만 이 전자지갑 애플리케이션을 테스트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의 디지털화폐가 주목받는 이유는 중국이 세계 최대 무역국이기 때문이다. 향후 중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수출입 품목이 위안화 디지털화폐로 거래될 공산이 있다. 특히 디지털화폐는 전송이 빠르고 편리하며 환전 및 송금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미래화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 디지털화폐의 익명성 보장
각국 중앙은행이 추진 중인 디지털화폐는 추적 가능한 중앙집권형 화폐다. 그런데 국민들 입장에서 자신들의 계좌가 추적당한다고 생각하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디지털화폐의 운영체계를 이원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곧 중앙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디지털화폐를 보낼 때는 추적 가능한 디지털화폐를 보내지만, 상업은행과 개인 또는 기업 간 거래에는 추적 불가능한 익명성이 보장된 암호화폐 시스템과의 연동을 검토하고 있다.
이원화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초당 30만건 이상 거래되는 소매시장까지 관여할 경우 통화 관리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액거래에서 개인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다만 이는 무제한의 익명성 보장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익명성’ 보장을 의미한다. 곧 일정액 이상의 큰 금액의 거래는 실명 전자지갑을 통해 거래되어야 하며, 또 마약·도박 등 불법거래 자금으로 의심될 경우 정부는 영장을 발부받아 거래를 추적할 수 있다. 곧 정부는 가능한 국민들의 거래 익명성을 최대한 존중하지만 필요시에는 개인 거래내역을 추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빅 브라더 사회의 본격적 도래다. 중국뿐 아니라 다른 중앙은행들도 비슷한 종류의 디지털화폐 결제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6개국 중앙은행이 암호화폐와 연동하여 디지털화폐를 개발 중이다.
세계는 디지털화폐 경쟁 중
중국 디지털화폐 테스트 발표를 계기로 디지털화폐가 세계 중앙은행들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오래 전부터 각국 중앙은행을 향해 암호화폐 연구를 권고해왔기 때문이다. 2020년 연초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 캐나다은행, 스웨덴중앙은행, 스위스국립은행이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에 대해 공동연구 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 디지털화폐는 달러인덱스와 관련된 6개국 모두가 개발하고 있다. 이로써 상기 6개국이 공동으로 사용 가능한 디지털화폐가 탄생하게 된다면 달러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기축통화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영란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는 2019년 8월 “달러 환율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글로벌 경제에 다수의 기축통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디지털화폐로 가상 기축통화를 만들자”고 제안한 바 있다.
브릭스 등 블록별 암호화폐 탄생 가능성
중국의 디지털화폐가 성공하면 그 다음 단계는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경제블록별 암호화폐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브릭스는 무역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3년에 브릭스 통화안정기금 발족과 2016년 브릭스개발은행이 설립·운영되고 있다.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2018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5개국의 국책 개발은행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블록체인 공동연구에 참가하는 5개 은행들은 브라질개발은행(BNDES), 러시아 국영 대외경제개발은행(VEB), 중국개발은행(CDB), 인도수출입은행(Exim Bank), 남아프리카공화국개발은행(DBSA)이다. 브릭스 5개국은 전 세계 인구의 약 40%, 전 세계 경제성장의 5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영향력이 큰 편이다. 따라서 브릭스 암호화폐가 탄생하면 그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입지가 많이 축소될 전망이다.
디지털화폐 사용은 화폐개혁 의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종이화폐와 달리 추적이 가능한 화폐다. 빅 브라더의 출현이 현실화되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질 것이다. 향후 디지털화폐가 대세가 되면 그간 지하에 잠겨있던 종이돈들이 환전을 위해 모두 은행으로 들어가 소유주의 실명을 밝혀야 할 것이다. 자연스레 화폐개혁의 성격을 띠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