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도, 이념도 못 가뒀다” ‘전설의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

1953년 영국 귀국 당시 어머니와. 당시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교도소 있고 탈옥 있다. 우연히 느닷없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조사와 준비 필요하다 영국인 소련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 입소하자 동료 죄수들이 ‘자유’를 선물하기로 결정한다.

동료들이 블레이크 탈옥 선사 모의

1922년 로테르담에서 출생.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영국국적 얻은 이집트 태생 유대인,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이었다.

1944 22세 때 영국해군 중위 임관, 해외 첩보 담당하는 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정보부, 일명 MI6) 요원 됐다. 독일어 유창해 U-boat 함장 비롯한 포로 심문을 담당했다.

러시아어 집중코스 2년 수료 후 1948년 26세에 주서울 영국대사관 위장직책 부영사로 배치됐다. 북한, 중공, 소련 첩보임무 담당했다.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잡혀 억류된다.

북한과 중공과 소련 첩보기관의 협박과 고문에 저항하자 정보부원이라 포로 아닌 간첩으로 총살명령 떨어졌다. 발포 직전 타협, 압록강 중공군 첩보부대 그 유명한 세뇌공작으로 소련 스파이로 변신했다.

1953년 영국 귀국 당시 어머니와. 당시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1953년 31세 석방돼 귀국. 결혼 후 1955년(33세) 베를린 근무하며 소련 스파이 활동 본격 개시했다.

1961년 39세. 레바논 아랍연구센터(the Middle East Centre for Arabic Studies) 연수 중 “본부로 오라” 지시 받았다. 다음 임지 협의라 해서 가볍게 갔다. 체포됐다. 망명한 폴란드 정보부 요원이 “블레이크는 소련 스파이”라는 증거를 이미 제시한 상태였다. 자백했다.

그가 제공한 정보로 처형당한 소련과 동구권 간첩과 협력자는 42명에 달했다. 1명 당 1년씩 총 42년 판결 받았다. 영국에서는 상류계급 간첩 많고 저들끼리 봐줘서 면소되거나 몇년 징역으로 끝낸다.

그런 관행 속 간첩재판 사상 최장기 형을 받은 것이다. 여론이 들끓었다. “유대인이라 그렇다.” 비난 일색이었다.

죄수들 뭉쳤다

원자력 반대 단체인 Michael Randle and Pat Pottle 창립 멤버. 데모하다 잡혀 18개월 형. 웜우드 스크러브즈에서 복역 중 블레이크 들어왔다.

“야. 블레이크 말야. 공평치 못하고 악의에 찬(unjust and vicious sentence) 판결 받았구나. 인종 차별, 계급 차별 받은 거야.”

그를 도와주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다. 탈옥시키자. 1962년 사제폭탄 투척. 7년 형 받은 무정부주의자 Sean Bourke가 가담해 계획 주도, 준비에 착수했다.

“교도소 설계도 입수하라. 경비 계획과 편성표도 필요하다. 도면 보니까 말이야. D동이 외곽 담과 제일 가깝다. 블레이크 너 말이지 교도관들 잘 사귀어서 그쪽으로 옮겨야 해.”

담벼락에 걸칠 밧줄 사다리 만들 재료. 갈아입을 민간인 옷, 구두, 필요한 현금. 준비는 모모가 분담한다.

랜들과 포틀 함께 탈옥. “블레이크를 동베를린까지 수송하는 거야. 자 그럼 각자. 열심히 하자.”

1966. 10. 22. 18:00

최적 탈옥 시기는 영화 상영하는 날 저녁 6시부터 7시 사이다. 재소자 강당에 다 모이고 간수 단 두명. 그마저 경비실에서 TV 시청에 여념 없다.

1966년 10월 22일 17:30 감방 점검. 블레이크 있었다. 90분 후인 19:00 블레이크 없어졌다.

5년 동안 수 없이 해본 예행연습. 교도관 점검 사이의 사각시간인 18:00에 나갔다. 수제 밧줄 사다리로 담 넘고 근처에 숨겨 논 밴 타고 도주.

이튿날 렌들은 밴 몰고 동독으로 출발했다. 밑바닥에 블레이크 숨기고 가족 다 타고… 경찰 세관 이민국 모두 가족여행이라 보고 그냥 보내줬다.

1966년 12월 동베를린 경비초소 소련장교에게 모스크바 모처에 “조지 블레이크 왔다. 연락해 달라” 했다. 소련정보요원 “동지 잘 오셨소” 했다. 바로 소련 행, 번역관으로 살았다.

탈옥수사 난항, 동료 죄수들은 침묵의 벽(wall of silence) 만들어 모르쇠로 일관. 공모자 밝혀내지 못했다. 같이 탈옥한 랜들과 포틀 둘만 잡혔다.

들통 난 베를린땅굴

1945년 비엔나 중심가 최고급 호텔. 소련 점령군 최고사령부가 들어섰다. 1949년 영국 정보부 MI6는 그 밑에 터널 뚫었다. 1955년 소련군 철수 때까지 도청했다. 재미 붙였다. “어이, CIA 친구들. 여기, 비엔나 땅굴 구경해 봐. 쓸 만하잖나. 베를린에도 만들자. 돈은 부자인 CIA가 대고, 기술은 MI6가 제공하고.” 

합의했다. 서베를린에서 굴착해 동베를린 안 1km 지점까지 뚫었다. 동베를린 소련 주둔군 사령부 바로 밑에 도달했다. 1955년 6월부터 편히 앉아 통신 청취 시작했다.

다 처리하지 못할 지경으로 군사정보가 들어왔다. 물론 욕설, 음담패설인들 어이없으랴. 들으면서. “낄 낄 낄.” 땅굴친구들 고생만 하고 그런데 아뿔싸! 

공사 착공 때 이미 이 사실을 MI6 직원인 소련간첩 조지 블레이크가 이 사실을 소련 KGB에 넘겼다. 소련군은 “니들 물 좀 먹어라” 허위정보 흘렸다. KGB 통제 받아 소련군이 내보내는 역정보逆情報를 토대로 나토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소련군 주둔지를 옮긴다는 도청전문이 들어오면 이에 대응하여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공산주의 국가와 바르샤바조약 군대가 이 소동을 다 지켜봤다. 

가만히 구경만 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자본주의 국가와 나토군에서 의심할까봐 모양새만 갖춘 훈련도 했다. “흐 흐 흐” 웃으면서. 그러길 아홉 달. 재미없어졌나? 1956년 5월 소련군이 도청터널로 밀려 들어왔다.

“Stop American!: 이 소리에 이어폰, 녹음기, 메모지, 마시던 커피, 피던 담배···. 그대로 놔두고 줄행랑쳤다. 한 1000만 달러 날렸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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