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뮬란’ 촬영지 中신강 거주 위구르족, 그들은 누구인가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편집위원, <지금은 중국을 읽을 시간> 등 저자] 디즈니사가 최근 만든 영화 <뮬란>의 촬영지 중국의 신강(新疆) 지역에는 위구르족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신강지역 거주 위구르족의 인권을 탄압해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위구르족은 어떤 민족이기에 중국정부의 탄압을 받아야 하는 걸까?
우리는 ‘위구르’라는 이름을 뉴스에서 들어 알고는 있지만 어떤 민족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위구르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위구르(Uighur)족 전체 인구는 10,069,346명(2010년 제6차 인구조사), 위구르족 전체 인구의 절대다수인 99%가 중국 서북부 신강지역에 살고 있다. 중국 전체 면적의 1/6에 해당하는 신장지역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이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래서 천산을 중심으로 북강(北疆)과 남강(南疆)으로 구분하는데, 위구르족은 남강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남강의 한복판은 타클라마칸 사막이기 때문에 사막 주변의 녹지대에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 위구르족의 연원을 찾아보면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4세기 <위서>(魏?)에 ‘원흘’(袁?, Yu?nh?)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후 5~6세기에는 위흘(??, W?ih?), 7~8세기 회흘(回?, Hu?h?), 788년~13세기 회골(回?, Hu?h?), 13세기 이후에는 위올아(畏兀?, W?iw?’?r), 민국시기에는 위무이(威武?, w?iw?’?r)라고 하였다.
1934년 ‘유오이’(?吾?, W?iw?’?r)라는 명칭이 사용된 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정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명칭이 시기에 따라 다른 것은 원음을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할 때 중국어 발음은 비슷하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국어 발음 ‘hui’는 고대에 ‘wei’와 혼용되었기 때문에 한자를 어떻게 쓰든 결국 발음으로는 모두 같은 것이 된다. 그들의 족명(族名)인 ‘위구르’는 ‘단합’ 또는 ‘단결’이란 뜻이다.
고대부터 현재의 몽골초원에는 수많은 부족과 민족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여러 유목제국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대표적인 민족을 등장 순서대로 나열하면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회흘(回?), 힐알사(??斯), 거란(契丹), 여진(女眞,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바뀜), 몽골 민족이다. 이중 현재의 위구르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민족은 회흘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할 즈음 북방 초원의 패자는 돌궐이었다. 당나라는 돌궐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세력을 약화시켰다. 마침내 8세기 중엽 돌궐 지배하에 있던 회흘족이 돌궐 정권을 전복하고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회흘은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히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는 데 군사적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9세기 중엽 자연재해와 내부 권력투쟁, 그리고 동북쪽의 힐알사의 침입으로 붕괴되어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회흘은 주로 현재의 파미르고원 부근, 투루판, 감숙성 일대의 세 곳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종족들과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현재의 위구르족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역사적으로 위구르인들과 가장 밀접한 조상은 회흘족이지만 서쪽으로 이동한 후 현지 주민들과의 혼혈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위구르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감숙성의 위구르인보다는 신강성 서쪽의 위구르인의 외모가 아랍인에 더 가깝다.
위구르인의 선조들은 8세기 중엽까지는 샤머니즘 위주였고, 9세기에는 이란 지역에서 당나라에 전파된 마니교를 받아들여 신봉하기도 하였다. 10세기 신강성 남부에서부터 이슬람교가 정착되기 시작하여, 신강성 서부는 이슬람교, 동부는 불교로 16세기까지 양분되어 있었다. 14세기 신강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몽골족의 지배계층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전체 몽골족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자 신강 동부 지역도 점차 이슬람화 되어 16세기 이후에는 신강 전체지역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18세기 청나라는 신강성을 정벌한 후 러시아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강에 살고 있던 카자흐족(Kazak), 키르키즈족(Kirgiz) 등은 유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이에 농업과 병역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남강의 일부 위구르인을 북강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그래서 현재까지 소수의 위구르인들이 천산 이북에도 거주한다. 그리고 13세기말 용병으로 참여했던 위구르인의 후손들이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도원(桃原)에 5천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종교, 언어,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한족과는 매우 상이하다. 현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중국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의 고유한 언어, 문화는 비교적 존중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정부는 각 소수민족의 고유문화를 보전하기보다는 한족 중심의 문화를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화교육을 대폭 축소하고, 한어와 한족문화를 강요함으로써 위구르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또한 한족과의 유혈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그 때마다 위구르인들에 대한 감시와 제약이 강화되었다. 게다가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국제사회는 중국정부가 직업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젊은 위구르인들을 수용소에 가두는 등 인권탄압을 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위구르인들을 강제로 한족이나 다른 민족과 결혼시킨다는 소문 아닌 소문도 있다. 이러한 의심들은 많은 경로를 통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