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탐방…늦가을 단풍계곡에 빠져들다

서울대총동창회 국토문화기행단(앞줄 맨 오른쪽이 필자) 

서울대총동창회 제1차 국토문화기행…화양구곡 일원서 

[아시아엔=정연옥 일본어 통번역사, 서울대 한국어교육지도자과정(KFL) 8기]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는 책에서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자유지만 가택연금 상태다”라고 언급했다. 이제 코로나로 인한 가택연금을 헤치고 국내여행이라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서울대총동창신문에서「제1회 국토문화기행」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Wow, 가자, 떠나자, 들로 산으로 자유롭게 훨~ 훨~ 나비처럼 ~’ 그런데 왜 그 많은 역사유적지 가운데 첫 답사지가 ‘화양구곡’(華陽九曲)일까?

화양구곡이란 말을 들으니, 갑자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영화제목이 떠올랐다. 화양연화(花樣年華)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자는 다르지만, 답사하는 모든 분들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는 안내 및 해설을 맡은 이민부 교원대 명예교수(전 대한지리학회장·한국지형학회장)의 바람이었까 혼자 상상해 본다.

11월 5일 서울대총동창회 이승무 사무총장 인솔 하에 참가자 일행은 정해진 시간(오전 8시 30분) 정확하게 충북 괴산을 향해 출발했다. 주최측에서 마련한 음료수, 귤, 김밥을 차안에서 먹으며, 이민부 교수께서 배부한 ‘화양구곡과 조선의 성리학’ 이라는 역사 자료와 시집을 읽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청명한 하늘과 신선한 공기,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 문화기행은 살아있음의 환희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게다가 지리학 전공자다운 구체적이고 명쾌한 설명은 평범해 보이는 바위, 산, 계곡을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속리산국립공원 내 화양천을 중심으로 약 3㎞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점에 구곡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구곡이 있지만, ‘괴산 화양구곡’은 1곡부터 9곡까지 거의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화양구곡은 조선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자신이 머물던 화양계곡에 9곡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우암 사후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년)가 설정하고, 이후 단암 민진원(1664~1736년)이 구곡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이민부 교수는 이곳을 ‘국토문화기행 1차 대상지’로 선택한 이유는 구곡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위, 소(沼), 절벽 등 자연경관이 우수하며 잘 보존되어 있고, 코로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유적과 암각자(巖刻字) 등 역사 문화적 요소가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탁월한 선택을 하여 우리에게 행복한 시간을 제공한 이민부 교수와 주최측에 감사드린다.

이민부 교수의 자료집을 감히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기암괴석이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2곡 운영담(雲影潭)은 경천벽에서 400m 정도 위에 있는 계곡으로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제3곡 읍궁암(泣弓巖)은 운영담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계곡 가에 있는 바위다. 희고 둥글넓적한 이 바위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했기에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은 활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활은 귀인의 죽음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효종의 승하를 말한다고 한다. 읍궁 옆에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 등이 중국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萬東廟)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

암서재와 금사담

△제4곡 금사담(金沙潭)은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같이 깨끗해 지은 이름이다.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중심이다. 금사담 옆 바위 위에는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송시열이 기거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현재의 암서재는 1986년 새로 지은 것이다. 1669년 송시열이 지은 시 현판이 암서재에 걸려있다.

시냇가 절벽 사이(溪邊石崖闢)
그 틈에 집 지었네(作室於其間)
차분히 성현의 말씀 찾아(靜坐尋經訓)
분촌도 아끼며 공부한다네(分寸欲躋攀) 

△제5곡 첨성대(瞻星臺)는 금사담에서 1㎞쯤 올라가면 나온다. 큰 바위가 첩첩이 겹쳐 높이 솟아 있고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첨성대 아래 큰 바위에는 암각문 즉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 만절필동은 황하(黃河)가 만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으로 간다는 뜻으로, 동(東)은 원래 중국의 동쪽을 가리키나 우리나라로도 볼 수 있다.

△제6곡 능운대(凌雲臺)는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인데,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붙인 이름이다.

△제7곡 와룡암(臥龍巖)은 계곡 가의 크고 넓은 바위(길이 30m·폭 8m)인데, 그 모습이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

△제8곡 학소대(鶴巢臺)는 바위가 쌓여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바위산에 큰 소나무들이 자라는데, 이곳에 학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학소대라고 했다 한다.

파천

△제9곡 파천(파곶 巴串)은 개울 한복판에 희고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그 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놓은 것처럼 보여 파곶이라 한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용의 비늘무늬를 연상시키는 포트 홀(pot hole, 돌개구멍)이 발달돼 있다. 파천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필두로 넓은 암반위로 계곡물이 춤을 추며 흐르는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 5일 서울대총동창회 주관 제1차 국토문화기행은 그 옛날 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을 지닌 곳, 그 전설만큼이나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파천(파곶)에서 마무리됐다. 늦가을 높은 하늘이 이날 따라 짙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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