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바로 알기⑤] 최초의 베트남 한류스타는?

풍칵콴(Phung Khac Khoan) 초상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외] 앞 시리즈에서 17세기 제주도 어민들이 베트남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베트남에 다녀온 사람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와 관련된 기록을 <지봉집(芝峯集)>, <지봉유설(芝峯類說)>, <매창집(梅窓集)>, <창석집(蒼石集)>, <해사록(海傞錄)> 등 적지 않은 서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들의 기록을 종합하면, 17세기 초 조완벽이라는 사람이 베트남에 세번 갔다.

그는 어떻게 베트남에 세 번이나 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보고 왔을까? 조완벽은 경상도 진주의 선비로 스무살 때인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1607년에 돌아올 때까지 10년간 일본에서 살았다.

조완벽이 한문을 읽고 쓴다는 사실을 안 일본 거상(巨商)이 그를 고용했고, 이 덕분에 그는 일본 상선을 타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후 조완벽은 조선에 돌아와 지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고, 또 지인들은 한양에 가서 그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것이 당대의 실학자 지봉 이수광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1597년에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다시 침략했습니다. 이때 사츠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조선의 경남 일대에서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 중에는 당시 스무 살의 조완벽도 있었습니다. 일본 큐슈의 가고시마로 끌려간 조완벽은 당시 교토의 대부호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 1554~1614)의 눈에 들어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스미노쿠라는 해외 무역사업을 확장하면서 한문을 잘 아는 인재가 필요했는데, 조완벽이 한문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조완벽은 1604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당시 다이비엣국)을 방문했고,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다이비엣국의 권력자 찐띠에우(鄭剿)는 조완벽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다이비엣국 사람들은 조완벽이 원래 조선 사람이었는데 전쟁 중에 포로가 된 것을 알고 불쌍히 여기며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이때 찐띠에우는 책 한 권을 꺼내 조완벽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시는 조선의 이지봉(이수광)이 쓴 것인데, 당신은 이지봉과 같은 나라 사람이니 잘 알겠지요?” 조완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양에서 먼 곳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에 포로가 되어 이지봉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다이비엣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 베트남 관리가 조완벽에게 이수광을 아느냐고 물은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박항서 감독을 알아요?”라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조완벽이 모른다고 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조선과 수만 리 떨어진 베트남에서 어떻게 이수광이 이토록 유명해진 것일까? 이수광(1563~1628)은 1597년에 당시 명나라 수도인 연경(燕京, 현재의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이비엣국의 사신인 풍칵콴(馮克寬, 1528~1613)을 만났다.

풍칵콴 사당

명나라에서는 외국에서 온 사신에게 여관을 제공했는데, 이수광과 풍칵콴이 같은 숙소에서 50여 일간 머물면서 교류했다. 당시 이수광은 30대이고 풍칵콴은 70세가 넘었지만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나누며 친해졌다. 풍칵콴은 이수광이 자신보다 훨씬 어리지만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이비엣국에 돌아가 이수광의 시를 널리 소개했기 때문에 다이비엣국의 선비들 가운데 그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뭐래도 최초의 한류 스타는 바로 이수광이 아닐까? 특히 한류의 시초가 K팝이나 K드라마, 축구도 아닌 시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편 이수광은 베이징에서 만난 풍칵콴을 이렇게 묘사했다.

Phung Khac Khoan 사당 앞에서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베트남 시민들

다이비엣국 사신 풍칵콴의 나이는 70살이 넘었는데, 이가 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입궐할 때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망건을 쓰고, 복식을 갖추었다. 그는 독서를 쉬지 않았다.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대부분 짧은 옷에 맨발로, 비록 겨울이라도 버선을 신지 않는다. (중략)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무늬가 없었다. 인상은 얼굴이 짧고, 눈이 우묵하고 성질은 온순했다. 그리고 검을 쓰는 것도 좋아하나, 그 방법이 다른데, 좀처럼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베트남 자료에 의하면, 풍칵콴은 하떼이성 타익텃면 풍사리 붕마을에서 출생하여 1580년 박사가 되었다.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한시는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며, 그의 고향에는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있다. 하노이와 호찌민에 풍칵콴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하노이시에는 풍칵콴고등학교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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