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가 뭉쳤다···은평구 동네 주치의 추혜인·유여원·박인필 ‘삼총사’

왼쪽부터 유여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상무, 박인필 살림치과 원장,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

[아시아엔=박수진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살림의원. 올해로 개원 8년차인 이곳은 간판만 보면 평범한 동네병원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주 특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살림의원의 주인은 의사가 아닌 주민 조합원들이다. 의료협동조합 형태로 출발한 병원이기 때문이다. 2012년 조합원 348명, 출자금 3200만원 규모의 소비자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이 살림의원의 모기관이다.

“의료협동조합을 세우고 싶다. 이왕이면 여성이 직접 참여해서 만들고 운영하는 곳으로”. 당시만 해도 도시에선 생소했던 의료협동조합 실험은 한 서울대 의대생의 야무진 꿈에서 시작됐다. 살림의원 원장이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 추혜인(서울대 의학 03-07)씨는 1996년 서울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가 여성단체에서 인턴십을 하며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어져 의대에 들어온 터였다. 예과 시절엔 의약분업 논란이 한창이었다. 협동조합 형태의 의료기관이라면 환자와 서로 신뢰하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의 꿈이 실현된 ‘살림’은 현재 조합원 2800명, 출자금 11억원 규모로 살림의원과 살림치과, 주치의제도를 운영하는 ‘건강혁신살림의원’, 건강센터 ‘다짐’까지 거느렸다. 지난 8월엔 사회적협동조합의 모범으로 대통령상도 받았다. 살림의 ‘얼굴’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추혜인 원장에게 인터뷰를 청하자 ‘대학 시절부터 여성주의로 의기투합한 조합 창립 3인방’이라며 두 명의 인터뷰이를 함께 추천했다. 살림 경영을 맡은 유여원(서울대 철학과 01-06) 상무이사와 박인필(서울대 치의학 03-07) 살림치과 원장이다. 9월 1일 살림의원에서 만난 이들은 “여성주의 건강관을 지켜온 게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자기 건강의 주체는 나 자신이며, 서로 함께 도와야 건강할 수 있다는 공동체의식 면에서 여성주의와 협동조합은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생각하는 여성주의 관점을 모두가 알기 쉬운 ‘평등, 평화, 협동’의 기조로 풀어냈죠.”

살림은 ‘모두가 평등하고 건강한 마을’을 목표로 진료보다는 예방을 지향하고, 적정진료를 통해 환자와 의사가 신뢰하는 병원을 만들어 왔다. 트랜스젠더와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등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진료 활동도 펼치고 있다.

“연령, 성별, 장애 유무가 다양한 환자들이 모인 대기실 풍경부터 다르다”는 설명이다. 병원 내에 치아 미백 등 미용과 관련된 광고를 걸지도 않고, 아이를 진료할 때 “엄마가 챙겨주셔야 한다”는 식의 보호자를 한정짓는 말도 삼간다.

“‘딱 집어 말은 못하지만 병원에 오면 편안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유여원) “그냥 ‘이런 약을 드세요’라고만 하는 게 아니라 환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충분히 설명해주는 게 좋으시대요. 의료인이 환자를 평등하게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박인필)

이들이 살림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 원장은 “진료실 밖에서 지역주민으로 환자를 만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환자분들이 진료실에 올 땐 에너지가 없고 힘든 상태지만 지역사회에선 너무나 반짝반짝하고 건강하게 살아가시거든요. 의사로서 사람들을 다른 관계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곳이죠. 그래서 살림을 시작할 때 의료진이 은평구 가까이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주민들도 바라던 바였고요.”

또 하나의 이유로 “환자만큼이나 의사도 신뢰 관계에 목말라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바깥에서 일할 때 치료 옵션을 제시하면 불신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여기선 그런 눈빛에 시달리지 않는 게 제일 편안하죠. 돈을 더 벌려고 하는 말이 아니란 걸 믿어 주시거든요.”(박인필)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의사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요. 환자들은 온전히 내 입장에 서서 가장 필요한 제안을 해주는 전문가를 원하고요. 그런 의사들과 지역민이 모여 만들었으니 살림은 쌍방의 신뢰도가 굉장히 높은 상태죠.”(유여원)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건강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살림의 정관에도 적힌 이 기치는 돌봄의 가치를 강조하는 고령화 시대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살림은 호혜적인 돌봄을 강조해요. 내가 널 돌봤으니 네가 나를 돌봐주거나 돈을 지불하는 관계가 아니라, 지금 건강하고 남을 돌볼 여력이 있는 사람이 돌보자는 거죠.”

고령 여성 근력운동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니 겨울철 고령자 낙상사고가 싹 사라졌고, 지난해 ‘건강혁신살림의원’을 통해 ‘초진 30분, 재진 15분, 매월 한번 주치의를 만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주치의 프로그램도 180명이 이용했다. 1년의 성과를 근거로 주치의제도 관련 정책을 제안하겠다는 계획이다.

살림치과

오랜 친구답게 세 사람은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유여원 상임이사는 추혜인 원장과 학생운동을 하며 알고 지내다 살림의 창립 준비에 합류했다. 졸업 후 여성단체 일을 하면서 非婚 여성의 건강권에 관심을 두던 차였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유일한 비의료인으로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서울대 치대 학생회장이었던 박인필 살림치과 원장은 서울대 의대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추혜인 원장을 잘 따랐다. 여성단체에서 의료봉사도 함께하며 꿈을 공유했다.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어요. 여성을 위한 10층짜리 의료건강센터를 세울 거란 말에 막연히 ‘옆에 있으면 몇 층엔 치과가 들어가겠다’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요.(웃음)”

살림이 알려지면서 살림을 ‘콕 집어’ 실습하러 찾아오는 모교 후배가 많아진 것도 보람이다. 추 원장은 주 2회 동네 왕진에 실습생을 데려가기도 한다. 병원 규모를 생각하면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후배들을 통해 살림의 뜻이 확산되는 모습에 뿌듯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힘이 되는 것은 살림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적극 참여하는 조합원들이다. 살림의 ‘살림’을 책임지는 유여원 상임이사는 지금껏 적자 한 번 없이 이끌어온 공도 조합원들에게 돌렸다.

“조합원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면서 적정진료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협동의 마인드가 있고 그게 밖으로 나와도 되는 환경이 필요할 뿐이에요. 헌신과 희생으로 좋은 일을 하다 지치는 것이 아닌, 착하게 살고 협동해도 결과가 좋을 수 있다는 실존 사례로 남고 싶어요.”(유여원)

“의료수가가 낮다고 하면 보통은 ‘의사들 밥그릇 싸움’이라 비판하는데 우리 조합원 분들은 심각하게 여기고 함께 고민해 주세요. 비용 절감을 위해 대청소도 자원해서 해주시고요. 협동하면 유리해지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추혜인)

한편 서울 은평구 외 타지역 주민도 가입 없이 병원을 이용하거나 살림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홈페이지 http://www.salimhealthcoop.or.kr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99호 轉載>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