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는 누가 창조했을까···美 NASA 과학자 원불교 특강
[아시아엔=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우주의 진리에 대한 표현이 종교마다 다르다. 천주교에서는 ‘하느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불교에서는 ‘법신불’(法身佛),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유교에서는 ‘도’(道), 도교에서는 ‘자연’(自然), 원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등으로 부르고 있다. 부르는 이름은 각각 다르나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린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표현한 말일 것이다.
얼마 전, 워싱턴DC의 미 항공우주국(NASA) 본부에 15년째 근무하고 있는 ‘원사공’(Thomas Cremins)이라는 분이 익산의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특별강연을 했다. 이 원사공이라는 분은 NASA전체의 전략과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과학자다.
이 분은 원불교 워싱턴교당 인근에 살고 있어서 출퇴근길에 교당 앞을 지나다가 원불교의 개교표어(開敎標語)인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보고, 매료되어 7년 전에 입교를 단행했다. 그때부터 원불교는 본인에게 연구와 수행과 배움이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원사공님이 불과 서너 살 때, 림프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다. 투병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서 큰 틀을 형성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께서 투병을 하는 아들을 보고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창조주는 누가 창조했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바로 그 어머님의 말씀이 화두(話頭)가 되어 지금까지 그 질문을 풀지 못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화두가 원불교로 인해 비로소 풀렸다. 신앙과 종교가 불완전하다고 느꼈던 개인적인 공허감을 채울 수 있었던 거다. 원불교를 알기 전에는 영혼에 대한 통찰과 생각이 오랫동안 표류했었다. 그러다 원불교를 만나 ‘원사공’이라는 법명(法名)을 받고나서부터 마침내 그 화두가 해결된 것이다.
그의 강연내용을 간추려 본다.
첫째, 세상에 대한 얘기다.
그는 어려서 암 투병을 하면서 받은 방사선치료를 비롯한 과학의 힘과 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받은 사랑의 경험으로 인해 그 은혜들을 세상에 돌려주고 싶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기술은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기에 의도와 목적이 중요하다. 도전에 처해있는 우리 자신과 세상과 우주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국한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우주에 대한 얘기다.
1992년 이전에는 태양계밖에 지구와 같은 행성이 존재할 수 있는지 증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우주에는 정말 많은 행성들이 있음을 알고 있고, 화성이 지구와 유사하게 메탄방출주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달의 다양한 비밀들을 밝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주의 5%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25%의 암흑물질과 70% 정도의 암흑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올 4월에는 그동안 이론상으로만 증명이 됐던 블랙홀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 블랙홀은 물질과 에너지가 서로 변환되고 있어, ‘일원상의 진리’와 같이 모든 존재의 중심이고, 끊임없는 새로운 시작과 창조가 일어나는 곳이다.
셋째,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해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결되고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태양계, 우주와 같이 큰 것에서부터 먼지, 미생물 같은 극소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는 모든 것은 물질·에너지·의식(靈氣質)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삼위일체론과 유사하다. 생명체에서 의식(意識)은 에너지를 움직이고, 에너지는 물질을 움직인다. 우리는 이제 ‘물질’이 변화의 주역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의도(意圖)와 행위는 에너지와 의식을 반영한다. 탐심(貪心) 진심(嗔心)에서 시작된 의도와 행위는 지속적 발전의 힘이 없다. 그것은 작은 것이고 나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비(慈悲) 관용(寬容) 무아(無我)에서 비롯된 의도와 행위는 끊임없는 발전과 영향력을 가져올 능력이 있다. <대종경>(大宗經) ‘교단품’(敎團品) 13장 말씀처럼, 뜻이 더 크고, 더 무아에 바탕했을 때, 그 영향력은 더 크다. 감사·수양·연구·자비는 이런 원리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높여준다. 이렇게 했을 때, 나와 세계와 우주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넷째, 원사공 교도의 시(詩) ‘일원과 같이’이다.
모든 것을 거느리되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
모든 변화를 넘어
업(業)을 넘어서
요란함과 주착을 넘어
고와 낙을 넘어
마음으로 알고
사랑으로 경험하며
모든 것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진정한 ‘하나’이며
‘무’와 ‘만유’를 서로 잇네
매 순간 매일 매일
쭉 그래 왔듯이
지금 그러하듯이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처럼.
다섯째, ‘공과 만유의 세계’에 대해서다.
모든 것은 공에서 생긴다. 티끌이 터럭이 되고, 우주까지도 이룬다. 모든 중심, 핵심은 비어있고, 모든 층은 바닥이 없다. 작은 질문, 사색, 기도는 금방 변색되고 사라지지만 큰 질문과 큰 기도는 공간과 장소와 마음 너머 진공에 이른다.
뭐라 잡을 게 없지만 모든 ‘그때’와 ‘이곳’과 ‘저곳’을 관통한다. 지극히 넓고, 관대하며 심오하여 ‘천둥 같은 침묵’에서 모든 영감이 깨어난다. 모든 소리, 모양, 생명들이 함께 엮어진 은혜의 감격은 모든 리듬과 운율(韻律)을 넘어선다. ‘여기’에서 모든 성현과 성자와 스승이 출현하고 ‘여기’에 가없는 영혼들이 만나 하나가 된다.
여섯째, 결론이다.
우리는 역사의 환상적인 순간, 바로 개벽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개벽은 정신개벽으로 완전해 질 것이다.
원불교 입교 불과 7년 만에 우주의 진리를 설파한다는 것은 아마 전생으로부터 수행을 쌓아온 상근기(上根機)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과연 창조주는 누가 창조했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