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 앞두고 무기력증에 빠진 당신께
아시아엔=천비키 SK와이번스 멘탈코치, 전 국가대표 컬링팀 멘탈코치] 새벽 5시반. 알람 소리와 함께 힘겹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갈까, 말까? 결국은 갈등 끝에 수영가방을 챙겨 어기적 어기적 집을 나섰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매일 아침마다 전쟁을 치른다. ‘수영장 가는 일’이다.
유독 추위를 타는 나는 그렇게 수영을 좋아해도 겨울만 되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한달 전에도 감기로 무너지면서 따뜻한 봄날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내친 김에 계속 쉴까? 그럼 멘탈코치가 아니지. 그래도 너무 추운 걸? 아니야, 가자!’ 내면에서 두 소리가 전쟁같이 들려온다. 물살을 가르는 쾌감과 더불어 늘 내게 잔잔한 깨우침을 주는 수영장의 얼굴들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얼른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다. 다시 겨울 수영에 도전한 것이다.
내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그 분들은 누구인가.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바람 불어도, 심지어 메르스 돌림병으로 온 천지가 얼어붙은 때에도 당당히 수영장을 누비는 분들! 바로 할머니들이다.
새벽부터 어르신들끼리 “언니~! 이리 와봐. 등 밀어 줄게” “아이쿠~ 어제 먹고 잤더니 또 몇 키로가 쪘네” 하며 유쾌한 소리로 샤워장이 떠나갈 듯, 수다 떠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활력이 솟는다. 뭐니뭐니 해도 그들의 삶의 얘기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면서 힘을 주기도 하나니!
15년 전,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는 75세 A할머니. 의사가 재활치료로 수영을 권해서 난생 처음 수영장에 왔단다. 물에 들어가는 게 겁 나 발가락만 물에 담가 물장구치고, 몸에 물만 찍어 바르기를 며칠째, 그러다가 누가 장난으로 풀장에 떠밀었는데 “나 죽는다!” 하고 고함을 지르고 허우적거리며 물먹은 그 날이 수영장에서 ‘머리 올린’ 날이 되었단다. 60세 때 시작한 수영이란 말에 절로 감탄이 된다.
78세 B할머니는 심장수술 이후, 과격한 운동을 하면 절대로 위험하다고 수영은 의사가 말렸다는 분이다. 하지만, 정형외과 의사는 아픈 다리 치료엔 수영이 최고라고 하니 어찌할까? 할머니의 결정은 내 평생 언제 수영해보느냐 싶어서 심장전문의 경고를 무시하고 10년째 물살을 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샤워 때마다 할머니의 갈비뼈대 위로 심장 수술의 길고 큰 꿰맨 상처가 희미한 훈장처럼 보인다. 87세 C할머니는 어떤가? 앙상한 미라가 걷는 듯, 보기만 해도 깨질까 불안해 보이지만, 물 속에만 들어가면 15바퀴씩 수영장을 도는 물개다. 이들 모두는 내게 살아있는 동기부여 교사다.
하루는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두 할머니의 대화를 들었다. 얼굴이 표범처럼 검버섯으로 얼룩덜룩 주름진 할머니는 조금 덜 주름진 이에게 “정말 자네같이 젊고 이쁠 나이에 사랑을 해야지”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별로 나이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내 나이가 되면 ‘안성기’를 한 트럭 줘도 귀찮어. 자네처럼 젊고 이쁠 때 사랑을 해야 후회가 없지” 하고 한마디 더 얹는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검버섯 할머니와 순간 내 눈빛이 마주쳤다. 어르신은 잔뜩 굽은 등을 두드리며 나를 올려다보셨다.
“아가씨는 몇 살이우?” 하더니 “왜 새벽부터 운동하냐”고 연거푸 물으셨다. 내가 반사적으로 “살빼려구요~” 하며 배시시 웃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쿠~. 그런 쓸 데 없는 짓 왜 해? 내가 그 나이만 되면 먹고 싶은 것 다 먹겠수. 왜냐~ 지금은 산해진미를 차려줘도 아무 식욕도 없어. 먹어도 소화도 안 되구. 그리니 맛난 것 많이 먹어요. 그리고 아가씨는 뺄 살이 어디있어? 다 젖살이구만.” 젖살이라는 말에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할머니는 덧붙였다. “다리가 아파서 어디 갈 수나 있어야지. 자식들이 프랑스에 보내줬는데 루브르박물관엔 들어가지도 않고 화단에 앉아서 종일 있었다우. 다리가 아파서···. 여행도 때 다 젊었을 때 해야지, 어딜 가도 감상력도 없고···. 그냥 비행기 하고 차 안에서 잔 기억 밖에 없어.” 할머니는 옷 가방을 들고 힘겹게 일어나더니 나와 덜 주름진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먹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마음껏 누리시게나. 사랑도 많이 하고. 내가 그 나이만 되었어도···.” 그는 우리가 마냥 부럽다는 듯 여운을 남기며 지팡이를 짚고 사라졌다. 할머니가 떠난 후 남겨진 ‘젊은’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72세라고 했다. 우리에게 사랑과 여행을 강조하고 먼저 나간 할머니는 82세란다. 뭉클하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삶도 시간도 흘러간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그 지나가는 시간은 붙들 수는 없다. 매 순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곧 현재(present)는 어제의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선물(present) 아닌가? 시간과 나이는 인간이 만든 개념이다. 따라서 어떻게 생각하고 믿으며 어떤 의도를 갖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유전자조차 행동변화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롭게 발현되거나 활성화된다고 말한다. 그것도 몇 분만에도 바뀔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변형된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도 한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심신의학의 선구자 어네스트 로시 박사는 “우리의 주관적인 마음 상태, 의식적 동기부여의 행동, 자유의지에 대한 인식이 건강을 최적화하는 쪽으로 유전자 발현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얼마나 희망적인 일인가.
‘늙은이’란 ‘늘 그러한 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늘 그랬듯이 그렇게 보지 않고, 늘 그랬듯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매 순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해보자. 그럴진대 그는 더 이상 늙은이가 아니다. 변화의 신선함에 녹아든 그이는 자연히 느낌 가득한 볼 빨간 감성소녀가 될 수 있다.
2018년도가 저무는 이 달, 당신의 삶이 혹여나 늦었다는 후회로 밀려온다면, 다 살았다는 맥 빠진 느낌이 든다면, 지금 당장 후회없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보자. 60세에 수영을 시작한 할머니처럼, 심장병을 딛고 물개처럼 활개 치는 할머니같이 늦었다고 생각한 지금 이 순간이 실은 가장 적당한 때다. 마음 먹는 순간 현재(present)의 삶은 선물(present)로 활짝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