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과 국정농단 재판 보며 ‘회광반조’를 생각하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요즘 국정농단 재판과 이명박 대통령을 보노라면 묘한 감정이 솟아온다. 단 한 사람도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다 대통령이 시켜서 한 일이고, 윗사람이 시켜서 한 일이며, 나는 잘못이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임제 의현(義玄) 스님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로,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잠시 동안 밝아지는 자연 현상” 또는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잠시 동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비유하거나, 사물이 쇠멸하기 직전에 잠간 왕성한 기운을 되찾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爾言下便自回光返照 更不別求 知身心與祖佛不別.” 너는 말이 떨어지면 곧 스스로 회광반조할 것이며, 다시 다른 데서 구하지 말 것이니, 이러한 신심(身心)은 불조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회광반조’는 선종(禪宗)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이켜 반성하여 진실한 자신, 즉 불성(佛性)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촛불은 다 타서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번 확 타오르고, 태양은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깔을 내뿜으며, 사람은 늙어서 죽기직전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이것을 불교의 선종에서는 “자기 밖의 욕망을 향하는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이켜서 자성을 직시한다”는 의미로 가다듬어 선의 방법론을 삼았다. 일거수일투족이 내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마음 아닌 것이 없음이라 일상의 모든 것을 안으로 돌이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남 탓할 때가 아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할 때 생각함을 알고,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말함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언행을 알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모든 것이 대통령이 시켜서 한일이고, 윗사람의 잘못이지 나는 죄가 없다고 할 것인가 말이다.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절대로 관상을 보러 가지도 말고 사주도 보러 가지 마라라. 오직 수도(修道)와 마음공부를 잘해서 마음을 잘 쓰게 되면 사주팔자를 뜯어 고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예화를 하나 해주었다.

중국 당나라 때 배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키가 5척 그러니까, 1m50cm 밖에 되질 않으며, 그 인물이 어찌나 못생겼던지 보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다 빌어먹을 팔자라고 말했다. 서당을 가도 친구들이 ‘너는 빌어먹을 팔자인데 공부는 해서 무얼 하려냐’고 놀리게 되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고. 그 어머니도 비록 자기가 낳은 자식이지만 워낙 못생긴 터라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저 윗마을에 사주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보러가자”고 데리고 갔다.

사주관상쟁이는 멀리서 사람을 바라봐도 척척 알아보는 위인이었다. 정승이나 판서감이 찾아오면 뜰아래까지 나와서 영접해 들어가고, 작은 벼슬을 할 정도의 인물이면 마루까지 나와서 영접해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배도가 대문 밖에 나타나자 방에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한 눈에 빌어먹을 팔자였기 때문이다.

배도 왈 “에이 빌어먹을. 어디 두고 보자. 내 이 사주팔자 고쳐 버려야지”하였다. 그리고 10년 작정하고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말았다. “요놈의 관상쟁이 이렇게 될 나를 내다보지도 않았지.” 벼르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찾아갔다. 그랬더니 배도가 사립문에 들어서자마자 버선발로 내려와 영접해 들이고 따로 정중히 예를 표하였다.

“그동안 어디서 무슨 마음으로 무슨 공부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는 빌어먹을 상이었지만, 지금은 당신 얼굴과 몸에 밝은 기운이 돌고 있어 상서롭기만 하외다” 하더란다.

소태산 부처님은 “마음공부만 잘하면 부처가 되고 팔자를 고치는 것이다. 그러니 사주관상 보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마음공부는 왜 하는가? 부처가 되고자 함이다. 그런데 부처를 이루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행자가 있다. 반대로 부처를 이루는 길을 알고 보면 수월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수행자들도 있다. 우리의 마음이 ‘원래는 부처’라는 것을 모르면 부처가 되는 것이 어렵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부처이니 무명(無明)만 털어 버리면, 부처라는 길을 알고 수행하면 효과가 잘 나타나고 재미가 있다.

그래서 이 몸이 법당이요, 이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이다. <원불교전서> ‘성리품’(性理品) 15장에 도를 찾는 얘기가 나온다.

소태산 부처님께서 봉래정사(蓬萊精舍)에 계시더니 선승(禪僧) 한 사람이 금강산으로부터 와서 뵈옵는지라, 물으시기를 “그대가 수고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멀리 찾아왔으니 무슨 구하는 바가 있는가?” 선승이 사뢰기를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 도 있는 데를 일러주옵소서” 소태산 부처님 말씀하기를 “도가 그대의 묻는 데에 있느니라.” 선승이 예배하고 물러가니라.

선승이 금강산에서 부안 봉래정사까지 찾아옴은 구도의 정열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도가 그대의 묻는데 있다’는 것은 언하(言下)에 분별이 끊어지게 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自性)을 회광반조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른지?

중생은 시선을 안으로 돌리지 않고,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권력을 향해 헐떡이다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마침내 형무소 붉은 벽돌 담장 안으로 끌려간다.

밖으로 향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 것을 선(禪)에서는 ‘회광반조’라고 한다. 늘 회광반조를 하고 사는 사람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없이 권력을 탐하지도 않고 결코 영어(囹圄)의 몸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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