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D-121] 강산에의 ‘라구요’를 18번으로 삼은 그들

평창올림픽이 4달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동계올림픽은 메달 수 못지 않게 남북관계 개선과 세계질서의 평화적 재편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 많다. 동계올림픽 하면 김연아와 이상화 그리고 쇼트트랙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언감생심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에 선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근 반세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 세계적인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가 있었다. 북한 출신의 한필화(1942년생)가 주인공이다. 그는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3000m에서 은메달을 따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場外에서도 세계적인 화제를 던졌다. 1971년 2월17일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녀는 도쿄에서 서울의 오빠 한필성(1932년생)씨와 국제전화를 한 것이다. 분단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의 통화는 한반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세계는 깊은 관심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아시아엔>은 남쪽 고 한필성씨 가족을 통해 남북한 전화상봉 이후 45년, 그들의 삶과 바램을 몇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추석 연휴가 거의 끝나가던 8일 밤 일산의 센트럴플라자빌딩 10층 일산부페파크의 한 룸에서 열린 ‘홍애자 권사 팔순 가족모임’에서 가수 강산에가 부른 ‘라구요’가 울렸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파토리 그 중에 18번이기 때문에..18번이기 때문에 고향생각 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곤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장남 한기석(59·농산물유통업)씨는 4년 전 별세한 아버지를 기억하며 어머니 팔순 축하를 위해 준비했다고 했다.

맏외손자 현진호(39·회사원)씨도 미리 준비했으나 외삼촌이 먼저 부르자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대신 불렀다.

‘라구요’ 가사와 음정 속엔 슬픔보다 흥이 넘쳤다. 온 가족이 함께 불렀다. 고 한필성씨 고향은 평남 진남포. 6.25 직후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와 60년 넘는 타향살이 끝에 별세한 한씨는 장년 시절 전파상을 운영했다. 한씨의 꿈은 언젠가 자신이 설치한 스피커에서 통일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거였다.

“아버지는 노래도 잘 부르셨지요. 약주는 못하셨지만, 흥에 겨우면 ‘서도소리’를 부르시며 어딘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응시하곤 했죠. 아마 고향 산천이었겠죠.”

큰딸 한애자씨(왼쪽)와 막내 태석씨가 어머니 옆에 나란히 앉아있다.

어머니(홍애자)의 팔순잔치 전날 파주의 한 식당에서 만난 막내 태석(51·사업)씨는 “아버지가 홀로 남하하시는 바람에 남쪽에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다”며 “그래도 4남매 낳으시고, 손자·증손자까지 20여 후손이 단란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태석씨의 계속되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일이지만 1971년 아버지가 고모(한필화)와 국제통화를 하시고 기자들이 집에 몰려왔지요. 용두동 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북한이 아니라 북괴라고 말할 때였잖습니까? 그래서 겁도 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노태우 정부때인 1992년 삿포로 아시안게임 감독으로 출전하신 고모를 아버지·어머니가 가서 만나셨어요. 저도 20대 후반이라 생생히 기억 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됐지요.”

그는 “고모님이 살아계신 지 궁금하다”며 기자에게 생사여부를 확인해 달라로 몇차례 얘기했다. 한필화씨는 1942년생이므로 올해 만 75세,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3~4년 전 소식도 간간히 인터넷에서 검색되곤 한다.

기자는 태석씨와 지난 9월초 처음 통화를 했다. 추석 명절도 다가오고 오래 전 취재했던 한필성씨가 떠올라 댁으로 전화를 했다. 한필성씨와는 7~8년 전에도 핸드폰(016-9852-65xx)으로 통화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 핸드폰은 결번이라고 나와 자택번호로 전화했다. 아들이 받아 한필성씨의 별세소식을 전했다.

기자는 한겨레 기자 시절, 1989년 2월 한필성씨와, 1960년대 세계 육상을 주름잡은 북한의 스프린터 신금단(1938년생)의 남쪽 이복동생(수억·1959년생)를 취재해 “올해엔 남북경기 열려 혈육 만나볼 수 있기를”이란 제목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1989년 2월 5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기자와 비빔국수를 먹던 한태석씨는 “평창올림픽이 남북관계가 확 풀리는 계기가 되면 정말 좋겠다”며 “어머니께서도 당신 생전에 평북 선천 고향에 꼭 다녀오고 싶어하신다”고 했다.

“사실 전에는 기자들 찾아오는 게 겁나기도 했어요. 집에 사진이고 뭐고 가져가면 돌려주지도 않잖아요.(웃음) 그것도 그거지만, 기관에서 와서 괜히 힘들게 하기도 했지요. 저도 해병대 근무때 정보병과 갈 수 있었는데, 신원조회에서 안되더라구요. 이제 세상 확실히 달라진 것 맞죠?”

한씨 일가를 만나고 갓 사나흘 지난 지금 이 기사를 쓰며 작고한 한필성씨에게 바치는 노래가 된 장남이 부르고 맏외손자도 준비했던 ‘라구요’ 가사가 자꾸 귓가를 맴돈다. 이날 강산에의 ‘라구요’는 분명 한씨 일가의 18번이었다.

눈보라 휘 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 중에 18번 이기 때문에..18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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