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멕시코 공권력②] 요새같은 ‘코르도바교도소’와 애견옷 디자이너 양씨 갇힌 ‘산타마르타교도소’
해외에서 사업하는 것은 국내보다 몇 갑절 힘들다고들 한다. 언어가 안 통하고 문화가 다르며 특히 법과 제도보다 물리력이 우선인 국가에선 더욱 그렇다. 게다가 공권력이 불완전·불공정한 경우 숨이 턱 막힌다고 한다. 멕시코도 그런 국가 중 하나다. 1968년 올림픽과 1970년 월드컵을 치르며 남미의 선도국가로 알려진 이 나라는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성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게 교민들 이야기다. 현지에서 물류사업으로 성공한 기업인으로 불리는 홍금표씨가 멕시코 공권력의 민낯을 고발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시아엔>은 멕시코 산타마르타교도소에서 20개월째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애견옷 디자이너 양모씨 사건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홍금표 대표의 기고문을 4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피해자한테 보석금 2천만원 요구하는 멕시코 판사
[아시아엔=홍금표 멕시코 현지 기업인] 교도소는 Cordoba시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다. 밀림 수준의 옥수수 밭을 한참 지나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 아래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이 서있다. 외진 곳에 있어도 재소자가 1000명을 넘어서인지 교도소 사무실은 타이핑 소리와 근무자들의 움직임으로 번잡하기만 하다.
판사실에 들어서자 7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Cordoba 교도소 파견 판사였다. 그는 법복을 입지도 않았고 전혀 근엄해 보이지도 않았다. 사무실 한켠 작은 공간에 잡다한 서류 더미에 둘러 싸여 그저 잔심부름하는 노인네처럼 보였다. 첫 인상과 달리 그는 아주 교활한 늙은이였다. 강도사건의 공범으로 엮여 피의자 신분이 된 우리 직원들이 즉시 풀려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럼에도 판사는 보석금을 내면 이튿날 구금된 직원들을 석방해 주겠다고 한다. 서류가 신속히 정리되면 당일에도 가능하다는 설명도 친절히 곁들여서 말이다.
피해자인 우리 직원들이 풀려나는데 무슨 보석금이 책정되어 있다는 것인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즉시 석방이라는 말에 이런 저런 이유를 대지 않고 바로 그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순간 판사가 제시한 금액을 잘못 알아들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오랜 세월 멕시코에서 살아 왔으면서도 일인당 250,000페소(당시 원화 약 2000만원)를 250페소(한화 약 2만원) 로 알아들었다. 너무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따질 이유가 없었다. 숫자 사이의 ‘Mil’(1000)을 빼먹고 들은 실수는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안도의 한숨까지 저절로 나오게 하였다. 그 큰돈을 바로 지불하겠다는 나의 말에 판사도 놀라했다. 미덥지 않았는지 금액을 다시 말 하는데 제대로 듣고 보니 직원 둘의 보석금 합계는 오십만 페소, 즉 한화로 약 4000만원 정도 되었다. 그 금액을 도합 4만원으로 잘못 알아들은 나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를 석방하는데 보석금은 무엇이며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닌 막대한 금액이 어떻게 판사의 입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강도나 절도나 차이는 있지만 같은 형사범죄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 Veracruz주에서 절도는 피해자가 합의해 주면 소정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번 우리 회사 휴대폰 강도사건의 죄명은 모든 서류에 절도로 표기되어 있었다. 안개가 걷히듯 그 동안 갖고 있던 의문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하였다. 피해자인 우리 회사 직원 2명이 오히려 형사피의자 신분으로 감방 신세를 지고 있는 데에는 음모가 숨어 있었다.
Z의 조직원 2인을 포함한 전체 6인의 진술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각각 상이하였다. 이를 구실로 Z와 한통속인 연방 공권력은 우리측 4인을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엮었다. 그런 다음, Z에서는 경찰을 돈으로 매수하여 이 사건을 강도에서 절도로 바꾸어 놓았다. 절도범으로 되어 있는 우리 직원들을 빼내기 위해서는 형식상이라도 합의가 필요하였다. 합의가 된다고 가정하면 공범으로 되어있는 6인이 다 석방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 지역 공권력과 Z에서는 조직원 2인을 구해내기 위하여 이러한 수를 쓴 것이었다.
수감된 무장 경호원 2인의 보석금은 그쪽 경호회사에서 알아서 정리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렇다 하여도 우리 직원 2인의 보석금으로 한화 약 4000만원을 지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판사와 보석금 네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일단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범죄 조직 Z의 변호사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 1명과 남자 1명이었다.
여성 변호사는 옷차림부터 그저 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여인이었다. 페이즐리 모티브로 뒤덮인 파스텔 톤의 헐렁한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C?rdoba의 한낮은 무척 더웠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녀는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서류철만 뒤적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남성 변호사는 일단 외모가 조직에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거한으로 검정색 정장에 길게 늘어진 시커먼 구레나룻 수염을 달고 있었다. 머리는 밀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없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연갈색의 민대머리였다. 풍채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하고도 남았는데, 변호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해결사처럼 보였다.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난 뭐에 씌웠는지 감히 Z의 변호사인 그에게 신경질 섞인 언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엊그제 한국 출장에서 돌아와 덜 풀린 여독에, 뒤바뀐 시차에, 또 아침 일찍 C?rdoba 교도소에 도착하기 위하여 새벽 5시도 채 되지 않아 시티에서 출발한 터였다. 게다가 피해자인 우리한테 판사는 거액의 보석금까지 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조직의 남자 변호사는 의외로 참을성이 많았다. 생김새와는 아주 다르게 나의 가시 돋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강도는 당신들이 했고 우리는 이미 피해자인데 여기에 추가 피해가 있다면 그건 당신 조직에서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우리 직원 2인의 보석금을 그들이 내라고 하였다. 당신네 조직원들 석방에 필요한 합의서 서명은 당연히 해 주겠지만 먼저 돈 많은 당신들 조직이 우리 직원들 보석금을 해결해달라고 그들을 상대로 객기인지 뭔지 억지를 부렸다. 우리 직원인 이상 교도소 안에 그냥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보석금을 피해자인 우리가 선뜻 지불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Z의 여 변호사가 땡볕 아래서 찾던 것은 나의 사인이 필요한 합의서였다. 내가 사인을 거부하자 Z의 남자 변호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여성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듯 말듯 순간 눈매가 잔인하게 변하였다. 어쩌면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황당한 경우여서 적절한 대응이 생각나지 않아서였을까, 여하튼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쪽에, 수감되어 있는 직원들 가족이 보였다. Pepe의 아내는 내가 다가가자 “Ay?denos Sr.”를 연발하며 계속 울기만 하였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여성 의류매장을 몇 개 운영하였을 때 지점 매니저로 한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2만페소를 건네고 바로 지불하라고 하였다. 그 돈은 감방 안에 있는 우리 직원 2인의 대한 보호비로 당분간 집단 린치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었다.
멕시코시티에 돌아오니 한밤중이었다. 여전히 결론을 보지 못한 우리 직원 2인에 대한 보석금 문제로 그 다음날 오전 11시 Z의 변호사들을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러려면 아침 6시 이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었다. 갑자기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 왔다. Z의 변호사들은 오늘 긍정적인 대답을 가져올 것인가?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 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 분야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내가 말로만 듣던 그들과 엮이게 되다니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삶인가 보다.
사라고사(Zaragoza)를 한참 지나 고속도로가 막 내리막으로 접어들 무렵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침엽수림의 음영 사이로 마치 짙은 색조 안개가 다가오듯 그렇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던 것일까. 도대체 그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 변호사는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일까. 날이 밝아 오면서 머리 속에서 잠자던 의문과 걱정들이 스멀스멀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고문 변호사 A는 노무 관련 문제를 해결하면서 제반 법률자문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형사사건 전문이었다. 공증 받은 나의 위임장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원래 이 일은 그가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관리 부서에서 연락을 받은 그는 이미 사건의 전모도 잘 알고 있었다. 그와 통화한 지난 일요일 저녁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다만 C?rdoba 동행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더니 잠시 후 하자던 통화가 벌써 2일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먹통이었고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그의 소재에 대하여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형사사건 전문이지만 악명 높은 범죄조직 전문은 아니라는 얘기인가? 지레 겁을 먹은 것이겠지. 사실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상대는 법리를 따질 대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상적인 타협을 허용한다는 것 자체에 지극한 반감을 앞세울 멕시코 최대의 범죄조직이었다.
어수룩하나마 내가 직접 허둥대는 것이 어쩌면 결과가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결정적 순간에 등을 돌리면 변호사로서의 존재가치는 제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그와의 관계도 함께 마무리될 것이었다.
이젠 견딜 만하다며 면회실에서 Pepe는 농담도 하였다. 알고 보니 어제 건넨 직원들 보호비는 통상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이었다. 매일 수차례 당하던 집단폭행이 멈춰진 것은 물론 폭행 가담자들은 앞다투어 우리 직원들의 친구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돈이 좀 있는 재소자 옆에 있으면 최소한 먹을거리는 상대적으로 풍족하기 때문에 Pepe는 하루 아침에 범털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11시가 상당히 지났는데도 Z의 변호사들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