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천하통일 38] 여불위 숙청 영정왕, ‘이사’를 발탁하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영정왕의 근성이 나온다. 죄인들의 처형장은 궁궐 앞. 의도적으로 모든 대신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노애는 가장 비참하게 처형당한다.

그는 목을 자른 다음 사지를 말 네필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차열형(車裂刑)을 당한다. 그 다음 당연히 노애의 九族은 아무 죄도 없이 모두 끌려와 아비규환 속에서 난도질당하고, 노애와 어머니 조태후 사이에 태어난 두 아기도 짐승처럼 죽는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울면서 매달리는 어머니의 애원도 한 방에 물리치고 두 아이를 차마 글로 표현하기도 끔찍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다.

태후궁의 가신들과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추방당한다. 아주 두 사람의 흔적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어머니 조태후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멀리 지방으로 거지꼴로 추방했다. 그 이후의 소식은 없다. 영정의 성미로 볼 때, 유배 가는 길목 숲속에서 아무도 안볼 때 자객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이때의 악몽으로 영정왕은 차후 죽을 때까지 3천 궁녀와 놀기는 했으되, 태후 정비를 두지 않았다. 만약 궁녀 중에서 누구라도 정비를 노리고 주접떨면 한 칼에 죽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모두들 왕이 어떻게 나오나 숨죽이며 관찰했다. 그것은 당연히 중부 여불위에 대한 처리 문제. 영정은 여불위를 정말 죽일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한 영정은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여불위는 이미 십여 년간 진나라에서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두른 최고권력자였다.

뿐인가, 그의 탁월한 사람관리 능력으로 그와 음으로 양으로 엮여있는 인적 커넥션은 넓고 깊었다. 그들 모두가 어린 영정에게 들고 일어났다. 여불위를 죽이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며 여불위를 옹호했다. “그는 충신이다”라며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궐내에 불온한 기미까지 보였다. 영정이 함부로 여불위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궐내의 모든 세력이 여불위 편이었다. 영정은 위기를 느꼈다. 여불위 또한 그답게 태연자약하게 난국을 돌파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도 영정은 여불위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영정은 독하게 마음먹고 일의 마무리를 처리했다. 여불위를 상국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고향 하남땅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보낸다. 거기서 근신하라는 지시다.

그러나 여불위를 잘 아는 인사들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고향집은 또 다시 식객들과 재사들로 붐빈다. 그에 대한 기대치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주위의 인간들은 은근한 기대를 불질렀다.

사실 당시 여불위가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여불위의 상황판단이 안이했다. 곧 모든 것이 정상화되리라 믿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들의 말로가 대체로 이러하였다.

여불위도 늙어서 평상심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영정, 넌 내 자식이다”라는 믿음 때문인지 그 옛날의 날카로운 판단력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도 나이 탓 이런가!

여불위는 영정의 무서운 감시의 눈을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저승사자가 도착한다. 그것은 영정왕의 친서 한 통. 대뜸 불문곡직 영정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하남 땅 10만호의 식읍을 갖고 있는가?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척관계가 있기에 짐의 중부라는 호칭을 얻었는가?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으니 이제 가족을 데리고 오지인 촉 땅으로 떠나라!”

당시 촉 땅은 그야말로 함경도 아오지 탄광지역이다. 지구를 떠나 죽으라는 말이다. 여불위는 자신의 시대가 다 했음을 비로소 깨닫고 미련 없이 독주를 마신다.

여불위여! 그래도 아쉬운가?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을 다 가졌던 그대가 아닌가? 궁내의 골칫거리를 일거에 정리한 영정왕은 이제 홀가분하게 큰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해 비상을 시작한다.

기원전 237년 왕위에 오른 지 10년차, 친정 시작 1년차다. 선왕 6대에 걸쳐 이룩한 모든 업적들을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다. 천하에 걸쳐 이루어진 6국의 합종책을 하나하나 깨고, 연횡책과 원교근공책으로 밀어부친다는 진나라의 기본전략에는 변함없었다.

얼마 전 영정은 천하의 인재를 얻었다. 그는 여불위의 집에서 그의 개인집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여불위의 집에 방문하던 때 영정은 그의 하는 일을 보고 그를 일단 중간관리로 발탁하였다. 그가 이사(李斯)다. 영정과 함께 천하통일을 이루고 마지막까지 그 위업을 완성하는 인물이다. 이사는 영정에게 있어 장자방이며 제갈량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영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이사

이제부터 이사의 행적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그는 고려 말기 최전방 북방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성계를 스스로 찾아가 새 나라 건설의 구상을 나누고, 그를 주군으로 모셔 조선을 창건한 정도전과 똑 같은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도전이 그보다 1600여년 전의 이사를 사숙하였다.

젊은 날 이사는 초(楚)나라에서 문서를 관장하는 말단 관리 노릇을 했다. 야심가인 이사가 자신의 처지에 결코 만족할 리 없었다.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이사가 관청의 쥐들의 습성을 관찰하게 되었다. 변소에서 사는 쥐는 오물을 먹다가 인기척이 나면 깜짝 놀라 내빼는 모습을 보였고, 반면 거대한 곡식창고에서 곡식을 먹는 쥐들은 인기척이 나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유유히 지나갔다. 이에 이사는 사람이나 쥐나 처한 환경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고향 초나라를 떠났다. 유학자이면서 제왕학과 법가의 최고봉인 순자를 찾아 제나라로 갔다. 순자의 유학은 공자나 맹자의 유학과는 달랐다. 그의 기본 사상은 ‘제왕학(帝王學)’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 말기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고 새로 일어나는 신흥지주계급의 요구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사는 제왕학을 공부하기 위해 순자를 택한 것이다. 이사는 부국강병학의 이론가답게 말한다. “비천한 것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없고, 곤궁한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없다”. 그는 강렬한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다. 탐구정신이 아주 강했고, 학업도 우수했으며 성적도 남달라서 순자의 눈에 들었다. 그리하여 순자의 수제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이때 다른 수제자 한 명이 있었다. 그가 법가의 최고봉 한비자다.

학업을 마친 이사는 전국 7웅의 형세를 살핀 결과, 오직 진(秦)밖에는 자신이 갈 곳이 없으며, 그곳에서 진의 재상이며 당대의 거부 여불위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스승 순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가자 순자는 그에게 왜 진나라로 가려고 하냐고 물었다. 이에 이사는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이야말로 공명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 뜻을 제대로 펼 수 있는 곳은 오직 진나라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비천함이 가장 큰 수치요, 곤궁함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지금 같은 전국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배운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스승 순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심만만한 수제자 이사를 보냈다. 이때 순자는 공맹의 유가들과 맹렬하게 토론벌이며 천하치국의 도를 논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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