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35살 ‘때 늦은 나이’라고요?···박노해 시집 ‘참된 시작’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머리를 45도쯤 들면 늘 마주치는 문장이 하나 있다.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박노해 시인이 2010년 가을 어느날 내게 써준 것이다. ‘이상기 仁兄’이라고 가로로 쓴 아래 세로 두 줄로 쓴 후 다시 ‘2010 가을날 박노해’라고 마무리 썼다.

나는 그의 시를 좋아하면서도 대학과 기자 초년 시절 이후 그의 시집을 사지 않았다. 그래서 영 미안하다. 대신 그의 시집이 오면 머리 맡에 두고 자주 읽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참된 시작>(느린걸음, 2016년 5월24일 초판1쇄)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면서 맨 뒷장을 보니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사진(p.4) 한겨레신문사 이종찬 전 기자 1991’

이종찬 기자는 필자와 한겨레신문 1기 입사 동기로 몇 년전 퇴직하고 지금은 귀향해 농사를 짓고 있다.

4페이지엔 “사형을 구형받고 나오는 박노해 시인”이라는 캡션과 함께 환히 웃는 시인의 모습이 있다.

박 시인 사진을 보니 1991년 3월초 어느 일요일 그가 체포되던 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에서 일하다 같은 날 잡혀간 후배의, 우리집 오트론 전화기에 녹음된 가쁜 음성이 생생히 들려온다. 수배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낀 그는 외출 중이던 내게 몇 차례 전화를 했던 것이다. “형, 지금 어디세요? 형 들리세요?” “형, 형···.” 그는 지금 동남아 어느 곳에서 그때의 열정과 뜻을 간직한 채살고 있다.

철 지난 나이에 아직도 노래방 가면 ‘서른 즈음에’를 철 없이 부르는 나를 박 시인은 이 시로 닦아세운다.

 

오늘로 내 나이 서른다섯

부러진 칠십이라 하던가

상처만큼 살았고 겪어온 나이

 

부드럽고 나직한 것이

더 힘차다는 것을 아는 나이

불타는 투혼에 묻혀진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

 

말 한 마디 글 한 편 결정 하나에

묻고 확인하고 다시 돌아보며

운동한다는 것이 젖먹이 아가를 품은 듯

떨리는 걸음임을 아는 나이

 

한 시절 모든 거시 선명했던 투쟁 속에서

깨질 것은 깨어지고 무너질 것은 무너져 내려

스스로 창조의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나이

 

서른다섯 생일날

감옥 독방 찬 바닥에 짬밥을 놓고

사과 한 개 초코파이 한 개 차려놓고

나이만큼 절실한 식사 기도를 드리니

 

더 겸허하고 성실하게 나아가게 하소서

더는 늦지 않게 그러나 서둘지 말고

새벽 종울림으로 울어 나 흐르게 하소서

-때 늦은 나이-

본래 이 <참된 시작>은 <노동의 새벽>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시집(1993, 창작과비평사)이다. 불온한 혁명가로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 독방에 갇힌 그가 세상 끝 절망의 바닥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노래한 것이라고 編者는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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