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은 ‘현각과 자현’ 보며 무슨 말씀하실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하버드 대학생이 스님이 되었다고 하여 유명하던 현각이 조계종을 떠났다. 그는 한국불교의 문제점으로 유교적 관습, 남녀·국적 차별, 형식주의, 기복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이 등을 들면서 “자기 본 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는 그냥 기복종교로 돌아갔다. ‘기복=$(돈), 참 슬픈 일”이라고 적고 “외국 스님들은 오로지 조계종의 데코레이션(장식품)”이라며 한국불교의 좁은 정신으로부터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있어서는 현각 스님만이 아니라 유명한 성철 스님도 장식품이 아니었을까? 張三李四에 불과한 자들이 몇 분 장식품을 세워놓고 理判事判의 구실 아래 조계종을 움직여왔던 것이 아닐까?
고려불교가 망한 것은 시대의 지도이념으로서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막대한 전답을 소유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승려의 부패가 극에 달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사대부가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정몽주의 성리학은 불교를 넘어서는 사상적 기둥이 되었고 정도전의 경륜은 이성계의 무력을 빌어 개혁을 뒷받침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분명 쿠데타였지만 이로부터 이어진 조선의 건국은 혁명이었다. 이들은 사원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민심의 환호를 얻었다. 오늘의 불교계가 처한 현실이 이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각의 지적 가운데 ‘유교적 관습’이 눈에 띈다. ‘유교적 관습’이라고 우회하여 지적하였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승려들 사이의 관계가 조폭들의 위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 전래의 장유유서의 양속은 일제하에서는 오야붕-꼬붕 관계와 같은 천격(賤格)으로 나아갔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종교계에서도 이와 같은 천격이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서구인은 이를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며, 하물며 수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각의 지적에 대해 조계종은 반발하고 있다. 불교계의 대표적 저술가로 꼽힌다는 자현 스님은 “이 분(현각)은 특별한 능력이 없이 하버드라는 한국인의 저급한 환상 때문에 처음부터 조계종의 상위 1%에 속했던 사람”이라며 “25년 동안 조계종에 빨대만 꽂고서 가장 좋은 조건 속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조건을 비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 말투가 어디서 익히 듣던 것 같다. 이에 대해 현각은 “(나는) 종단의 상태에 대해 오래 전에 이뤄졌어야 할 토론을 자극한 것”이라며 “정치와 극단적으로 완고한 민족주의 때문에 (선불교를) 세계에 전하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나, 우선 두 스님의 어법이 무척 다르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어느 사회든지 엘리트가 이끌어가는 걸 탓할 수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원효는 신라, 의천은 고려의 왕족이었다. 왕실과 귀족이 자식 중 하나는 승려를 만들었다.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본래 하나이어야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스님과 신도가 분리되어 있다. 스님에 대해 신도가 별로 외경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세속에 물든 한국 승려들은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랏사에 가는 티베트 불교의 고행을 생각이라도 해보았는가? 종교개혁은 교황이 베드로성당 건립비 충당을 위해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을 비판한 95개조를 루터가 뷔르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각의 아픈 지적이 루터의 95개조와 같이 좁게는 조계종, 넓게는 모든 종교인에 아픈 등에가 되었으면 한다.
성철 스님, 현각 스님이 한낱 조계종의 장식품이 되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