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비박·진박·더민주·국민의당 여러분, ‘사마천과 임안장군 일화’ 들어나 보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총선을 앞두고 정계는 가히 이합집산과 배신의 계절로 들어선 느낌이다. 여당은 친박(親朴)과 비박(非朴)에서 진박(眞朴), 중박(中朴), 망박(望朴) 등 카스트 제도와 같은 계급론까지 나올 정도다. 야당은 한술 더 떠서 매일 영화를 누리던 당을 배신하고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다.

신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정치판이다. 아수라(阿修羅)와도 같은 정치인이라 해도 누구 한 사람 만고신의(萬古信義)를 갖춘 위인(偉人)은 없을까?

만고신의에 대해 알아보자. 만고(萬古)는 ‘오랜 세월을 통해 변함이나 유례가 없음’을 나타낸 말이고, 신의는 ‘믿음과 의리’를 아울러 이른다. 정치를 통해 국민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어찌 덧셈과 곱셈의 정치를 못하고 뺄셈과 나눗셈에 골몰하는 것일까? 그건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주견에 집착하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99년경, 중국의 한나라 무제(武帝) 시절 이야기다. 지혜롭고 용병에 능하였던 두릉 장군은 겨우 50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기 위하여 떠난다. 장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며 적진 깊숙이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던 중, 용맹스럽게 전투에서 많은 적을 무찌른 두릉 장군은 최후까지 잘 싸웠으나 말에서 떨어져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이 황제에게까지 전해지는 동안 그는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 되자, 두릉 장군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오히려 적군의 중신으로 쓰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한 무제는 이를 듣고 격노하였고, 즉시 중신회의가 소집되었다. 중신들은 무제 앞에서 두릉 장군을 욕하기 시작했다. “폐하, 그자는 혼자서 부대를 벗어났다는 것부터가 무책임한 자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그자는 전에도 돌출적인 행동으로 고집이 세고 잘난 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부하로 두었던 자까지 입을 모아 욕했다. “폐하, 잠시나마 그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그자의 남은 삼족을 멸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고집불통에다 부하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황제라는 것을 잘 아는 중신들이기에 아무도 감히 무제의 기분을 거스르지 못 했다. 이때, 말석의 한 젊은 신하가 불쑥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두릉 장군은 전투에 나간 지 반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 중신은 그가 전투에 나갈 때 배웅을 하며 장군의 지략을 찬양하고 또 그가 전도유망한 장군이라고 칭찬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년도 안 되어 그의 사정을 알지도 못 한 채, 그를 역적으로 모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평소 그의 품성과 충성심을 보아서는 그는 분명 적진에 홀로 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진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를 결코 욕해선 안 될 것으로 압니다.” 이 신하가 바로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러나 황제의 기분을 거스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사마천은 사형은 면했지만,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궁형은 예전에 중국에서 비롯된 오형(五刑) 가운데 하나로 죄인의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이다. 사마천에게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남자답게 죽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기도 하였고, 어딜 가나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던 중 임안 장군이라는 사람이 사마천을 찾아왔다. “사마천, 더는 수치스럽게 살지 말고 이 독약으로 자결하시오.” “싫소.” “사내가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섭소? 깨끗하게 죽으시오.” “싫소, 끝까지 살겠소.” “황제에게 직언을 주저하지 않던 당신이 왜 그리 목숨에 연연하는 것인가요?”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0년, 15년이 지난 후 말하리다.” “아니 그때까지 살아 있겠다는 말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몇 년 후, 임안 장군도 누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사마천이 그의 감옥에 몰래 찾아갔다. “아니 사마천이 이 감옥에까지 웬일이시오?”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 사내답게 죽겠소, 당신처럼 그렇게 연명하지 않겠단 말이오.” “보시오, 임안 장군. 내가 왜 연명하고 사는지 아시오? 나는 살아서 역사를 쓸 것이오. 이 나라의 간신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놓고, 황제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며 살았는지 나는 분명 살아서 모든 것을 역사에 남길 것이요.”

이 말을 들은 임안 장군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마천은 훗날 역사서를 완성하였는데 그 책이 <사기>다. 다수가 옳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다수가 그르다 하여 반드시 그른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타인의 의견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말고, 자신의 신념 아래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경륜이 우주에 통하고, 신의는 고금을 일관해야 한다. 경륜이란 발원(發願)이고 계획이다. 따라서 발원과 계획이 커야만 성공도 크다. 그리고 신의란 신념과 의리이니, 그 발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정성과 노력을 쉬지 않아야 큰일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만고신의의 정신이다.

정치지도자들은 가볍게 이리저리 철새 노릇을 하는 소인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틀림’과 ‘다름’을 인정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합심 합력하여 국민들에게 평안과 안녕을 선사하는 정치를 하면 좋겠다. 옳지 못하게 아첨과 분파를 조장하는 역사는 만고에 부끄러움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역임한 대산(大山) 종사께서 <법어 제1 신심편 6장>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만고일월(萬古日月)’이시라면, 정산(鼎山) 종사는 ‘만고신의(萬古信義)’이시니라. 정산종사는 스승님께서 어떤 일을 시킬지라도 한마음으로 받드셨고, 나 역시 소태산 부처님과 정산 종사를 내 생명과 같이 받들 뿐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느니라. 사람이 재주가 늘고 힘이 생기면 스승을 자기 잣대로 재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대하기 쉬운지라. 그러하면 법맥(法脈)이 끊어지고 큰사람이 되기는 어려우니라.”

정산 종사는 소태산 부처님의 뒤를 이은 원불교 2대 종법사다. 소태산 부처님을 향한 만고신의(萬古信義)의 생애로, 사량계교(思量計巧) 없이 온통 받들어 40대초 젊은 나이에 대신성(大信誠)으로 원불교의 법통을 이은 종통여래(宗統如來)다.

정산종사는 후일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발표했다.

첫째, 동원도리(同源道理)다. 세계의 모든 종교인이 다 같이 종파의 울을 벗어나 이 세상 모든 도리가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고,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리고, 한 울안 한 이치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게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동기연계(同氣連繫)다.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다 같이 종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종족이 한 집안 한 겨레임을 알고, 한 집안 한 겨레임을 알리고, 한 집안 한 겨레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셋째, 동척사업(同拓事業)이다. 세계의 모든 사업인들이 다 같이 사업의 편견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일이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고,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리고, 한 일터 한 사업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한 정파(政派)에서도, 한 종파(宗派)에서도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이합집산을 하는 정치인과 종교인들을 보면 정말 가소롭지 않은가?

스승이 인연을 만나되 먼저 그의 신성(信誠)을 본다. 인연이 독실한 신심이 있으면 그 법이 건네지고 성공을 이룰 것이다. 스승을 의심하지 않고, 스승의 지도에 순응하며, 어떤 지시도 다 달게 받고 불평이 없으며, 스승에게 자기의 허물을 도무지 숨기거나 속이지 않으면 그야말로 능히 불조(佛祖)의 법기(法器)라 할 수 있다.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주지만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성현들은 사가 없이 평등하게 법(法)을 설하여 주지만 신(信)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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