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소설 ‘갤리온 무역’ 30] ‘동의보감’ 허준과 미라의 인연
제6부 동업 그리고 조선여인 4
[아시아엔=문종구 <필리핀바로알기> 저자] 애드문은 그녀의 미소에 가슴 밑바닥부터 기쁨이 움터오는 것을 느꼈다. 들고 왔던 보자기를 풀어 책을 한 권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구했던 <동의보감>이라는 조선 책이었다.
“미라 씨, 이것은 조선의 의학 서적이라고 하던데, 본 적 있나요?”
책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머금었다.
“혹시 그 책의 저자를 아시는지…..?”
애드문의 물음에 미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의 눈물과 보물인 양 소중하게 책을 받아든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미라와 그 책의 저자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을 것이라고 애드문은 짐작했다. 그 책의 저자인 허 준 선생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그 책을 팔았던 상인에게 들었으나 차마 그녀에게 얘기해 주지 못했다.
미라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처음 조선 궁궐에 끌려가 종으로 일하게 된 1584년에 허준은 선조 왕의 어의御醫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허 준의 나이는 39세. 허 준은 미라의 성실함과 영특함을 높이 사서 자신의 곁에 두고 가르치면서 돕게끔 했다. 미라는 수년 동안 허 준의 지도를 받고 그를 도우면서 의술에 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허 준의 의서 집필도 도왔다. 그런 까닭에 스승의 저작인 <동의보감>을 어찌 몰라볼 수 있었을 것이며, 스승과 고향이 그리워 어찌 눈물을 참을 수 있었겠는가.
애드문이 미라에게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이 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미라 씨가 괜찮다면 짬을 내어 스페인어로 번역해 줄 수 있을까요? 사례는 후하게 해 드리겠소.”
미라는 가벼운 목례와 마음씨 따뜻한 미소로 승낙을 표시했다.
12월 중순 유다양이 느닷없이 자신에게 단독관리권과 단독운항권을 준다면, 멕시코까지의 오리엔트 호의 관리비와 항해경비를 유다양 혼자 마련하고, 멕시코에서 도자기를 판매한 후 유다양의 경비를 우선 정산하고 나서 동업자 지분대로 이윤을 배분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유다양의 자금력과 경험부족에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행 중에서 맨 먼저 헬리가 적극적으로 유다양의 제안에 동조했고, 며칠 후 애드문도 젊은 동업자의 열의에 매료되어 별생각 없이 동의해 주었다. 크리스전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마지못해 동의했다. 대신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계약서에 첨가하기를 요구했다.
첫째,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동업자 네 사람의 만장일치 동의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둘째, 유다양은 매월 20일 오리엔트 호의 정확한 위치를 보고해야 하고, 보급품과 화물 상태를 보고해야 한다.
셋째, 오리엔트 호에 선적되고 하역되는 화물과 보급품의 수량을 체크하는 사무장은 유다양을 제외한 세 사람이 합의하여 선정한다.
넷째, 지분을 양도하고자 할 때에는 다른 동업자들이 우선 매입권을 갖는다.
유다양이 위 네 가지 조건을 수락함에 따라 마지막으로 수정된 투자계약서가 준비되었고, 1616년 1월초에 동업자 네 사람이 서명했다. 애드문과 크리스전의 신임과 위임을 받은 유다양이 헬리와 함께 오리엔트 호의 실제 가치를 조사한 후 은화 800냥으로 최종 합의했다. 당시 시세로 은화 한 냥은 명나라와 스페인 지방 관리의 한 달 치 급여 또는 쌀 열석의 가치에 해당했다.
애드문, 크리스전, 유다양이 오리엔트 호 지분 매입 금액으로써 각각 160냥과 240냥, 총 560냥을 헬리의 마드리드 구좌로 입금하기로 했다. 유다양으로서는 그 동안 모았던 전 재산을 올인All-in하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도박을 한 셈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