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 “국사교과서 국정화보다 더 중요한 건 평화사관”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한겨레>는 23일자 일간지 1면 사이드톱과 이날?새벽부터 오전 내내 온라인판 톱으로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를 올렸다.? [MB정부 국편위원장 “국정화 2년짜리…애들 상대로 뭐하나”]라는 제목 아래 ‘MB정부 국편위원장 지낸 노학자의 일갈’,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침묵 깨고 비판’이란 부제를 달았다.
정 전 위원장 인터뷰는?서울대 국사학과 제자인 김종철 기자가 했다. 정 전 위원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주입식 강요하나 국정화 취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다.
기자는 <한겨레> 인터뷰를 읽고, 23일 오전 정 전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교과서 관련, 보다 심층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기자는 정 전 위원장이 2013~14년 서울대사학과총동창회 회장 시절 총무로 맡은 인연으로 월 2~3차례 통화하며 여러 자문을 얻고 있다. 이날 통화는 평소와 달리 곧바로 국사 교과서 문제를 여쭙는 걸로 시작하고 맺었다.
다음은 정옥자 전 위원장과의 통화 내용 요약이다.
왜 그렇게 국정교과서에 사람들이 매달리나? 국정교과서는 이미 시대에 뒤진 거로 북한이나 몽고 같은 후진국이나 독재국가에서나 있다. 단일 교과서를 강요하는 건 교육이 아니다. 단일한 역사관을 왜 강요하나? 역사라는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니라 해석이 바뀌는 거다. 애들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애들한테 하나만 강요하면 안 된다. 그래서 검정이 역사와 교육의 발전이라 본다. 검정은 당연한 거다.
국정으로 한 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이건 안 맞다고 하여 교육부가 검인정을 주관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맡긴 게 아니라 교육부가 검정위원회를 조직해서 했다. 검인정을 당연히 국편에 맡기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위원회를 조직해서 하고 국편은 이름만 넣었다. 나도 국사편찬위원회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위원장으로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국편이 하지도 않으면서 교과서 뒤에 이름을 넣느냐고 따졌더니 교육부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더라. 당시 교육부는 국편의 부장급 몇 사람을 검정위원회에 넣어놓고 들러리를 세웠다. 국편은 주체적으로 주관도 안 하면서 이름만 들어간 거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넣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주호 차관이 그런 사실을 알고서는 엄연히 국편이 있는데 검정위원회를 조직해서 이런 일을 하니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편한테 맡기도록 했다. 그 당시 그는 실세여서 교육부 국장급, 과장급들이 토를 달 수 없었다. 하루는 이주호 차관이 만나자고 했다.?그는 ‘검정은 국편이 맡아야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 국편 직원들한테 얘기하니 ‘2년 정도 준비기간을 갖고 맡자’고 하더라. 내가 답했다. ‘그때는 내가 위원장을 그만둘 텐데, 못하면 지금 못하겠다고 해야지 2년 뒤에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 국편이 당시 검정을 맡게 됐다.
그런데 맡고 보니 검정까지 6개월 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굉장히 걱정이 됐다.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정밀한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 국립대 출신의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 책임을 맡겼다. 중도적 입장의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기준을 만들고, 나와 전직원이 읽고, 여론 수렴을 거친 뒤 확실한 기준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국편은 비상체제로 돌입해 몇날 며칠 밤 새우며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 사이 이주호 차관이 장관이 됐다. 국편이 검정 작업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주호 장관이 전화해서 ‘저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는 내년 봄까지 위원장님이 하시는 걸로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오더가 떨어졌으니 어떡하냐. 죄송하다’고 하더라.
장관도 기가 막히는지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장관님, 신경 쓰실 거 없다. 개인적으로 무거운 짐을 벗어서 시원한 점이 있다’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실무 책임 그 구관이 ‘그만두세요? 저는 위원장님 믿고 앞으로 생사를 같이하려 했는데 그만 두시면 저는 못합니다’ 하더라. 내가 ‘다음 위원장도 믿을만한 사람 올 테니까 걱정 말라’고 위로하고, 그날로 보따리 싸가지고 나왔다. 준비만 하고 미처 실행은 못하게 된 것이다.
실무를 책임지던 분은 어디 학교 교감으로 나갔다. 그 후 준비 부족 상태에서 검정을 제대로 못하고 나와 사실 오류, 오탈자, 역사관의 문제, 그리고 솔직히 북한찬양하는 내용도 나왔다. 그래서 뉴라이트에서 난리가 났던 거다. 실제로 들여다보니 틀린 게 많았다. 틀린 교과서에 대해 국편이 할 말이 없게 된 거다. 부실 검정을 한 국편이 1차적으로 책임이 있고 교육부가 자체적으로 위원회 구성한 것이 문제다.
기자가 “일각에서 국정을 하되 여러 의견을 모아서 절차를 잘 지키고 단일화해서 책을 내면 어떠냐는 얘기도 있다”고?묻자 정옥자 전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이미 검정이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거꾸로 돌아가서 국정을 한다는 건 시대착오다. 필자들이 거부하는데 거기서 과연 좋은 교과서가 나올까? 쓸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선진미한 교과서가 나오겠나. 말은 좋은데, 그 의도에 대해 의심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정옥자 전 위원장의 계속되는 얘기다.
“오늘 아침 한겨레 보도 보고 상당히 온건한 제자들이 전화해서 시원하다고 그러더라.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뭐하는 건지 참 창피하다. 대통령은 갈등 조장이 아니라, 갈등을 줄이고 사회통합으로 나가야 하는 건데 거꾸로 가는 게 안타깝다. 지금 출세주의자, 사심에 꽉 찬 사람, 기회주의자들이 국정교과서에 앞장서는 걸 보고 내가 되레 창피하다.”
기자가 “선생님은 이념적으로 중도, 중간 정도 아니신가요?” 물었다. 정 전 위원장이 답했다.
“사실 나는 이데올로기를 인정 안하는 사람이다. 좌파, 우파 이런 거 다 편싸움, 저질 싸움이다. 땅따먹기는 실제 영토지만, 머릿속에 땅따먹기 하려고 덤비는 거다. 나는 이걸 굉장히 저질 이데올로기라고 본다.?거기에 줄 서서 싸우는 건 참 유치한 짓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가 이런 싸움과 갈등이 판치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정옥자 전 위원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평화사관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기자가 “전적으로 공감했다”고 했다. 정 전 위원장의 계속되는 얘기다.
“평화사관은 정말 내 신조다. 갈등을 조장하고 싸워야만 정치를 하는 줄 아니까 문제다. 사람이 싸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뺏기면 기진맥진해서 세상을 어떻게 사나. 나는 파이팅이라는 말도 싫어하는데 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에, 개인이나 국가나 단체가 모두 그렇게 짜여 있어서 걱정이다. 앞으로 평화사관이나 문화사관으로 안 가면 인류가 계속 고통받을 게 틀림없다. 반드시 평화사관으로 가야 한다. 원칙주의자들이 술수 쓰는 사람들한테 밀리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