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전승절 참석 박근혜 대통령, 명성황후·선덕여왕의 지혜 발휘하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것이 1895년이다. 이래로 중국의 역사는 치욕의 내리막길이었다. 이번 항일전 전승절에 중국은 이 치욕의 120년을 기억하기 위해 120발의 조포를 쏜다고 한다.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주는데 있어 이만큼 서릿발 같은 것이 없다. 일본은 이제 중국의 복수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전전긍긍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는 한국만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서서 화해를 주선할 수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백년도 전에 이 구도를 제시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자 한국을 멸망시켰다. 1895년 조선의 왕비가 궁중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前代未聞의 凶惡으로 조선은 이미 종말을 고했다. 1910년 한일합방은 요식행위였다. 이래로 일본의 대륙진출의 선두에 선 무리는 흑룡회였다. 학자, 신문인 등 대륙낭인들이 그들이었다. 이번 <산케이신문>의 박대통령 비방 칼럼은 흑룡회 이래의 낭인들이 여전히 일본에서 암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89년 부임하여 20년 넘게 <산케이>의 서울지국장으로 활약했던 구로다 가쓰히로 같은 자는 그 대표다.
일본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겪은 세대가 사라짐에 따라 이들 흑룡회 무리들은 기승을 부린다. 아베 신조는 그들의 우상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전쟁에 패한 나라는 비참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 후 새 쇼군으로 군림하게 된 마카사 원수의 시종으로 국민 배우 하라 세스코를 공납했다. 잠자리 시중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실각시킨 여장부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냥 왕의 생부가 아니다. 흥선대원군 이전에 ‘살아 있는 대원군’은 없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 60년 세도를 몰아내고 왕가를 일으킨 절치부심의 쿠데타에 성공한 영걸이었다. 명성황후는 이러한 대원군을 실각시킨 영걸이었다. 명성왕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인 외교로 일본의 한국 합방은 러일전쟁이 종료된 1905년 후인 1910년으로 10년이나 뒤로 미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라의 27대 선덕여왕에 비유할 수 있다. 삼국통일은 29대 무열왕 때부터 시작되어 30대 문무왕 때 완성되지만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 등과 더불어 통일의 기초를 닦은 영주였다. 중국에는 최초의 여제가 된 궁녀 출신의 측천무후나, 역시 동태후와 더불어 태후의 하나였다가 마지막 제국 청의 실권자 역할을 한 서태후 등의 여걸이 있지만,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뒤를 이은 정통 군주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담한 대중외교 전개로 일본인들은 속이 쓰린 모양이다. 명성황후를 들이대며 ‘사대주의의 누습’이라고 비방하나, 남의 나라 외교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가소롭다. 명성황후를 들이대면 한국인의 배일감정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박 대통령의 대중 외교는 선덕여왕의 통일전략과 같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의 지원을 받았으나 통일 후에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실크로드의 한쪽 끝에서 당과 더불어 극성을 누렸다. 중국의 세계전략 一帶一路 전략에 우리도 동반 참여하여 번영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국가적 선택이다.
흑룡회 무리들은 이 큰 그림을 보고 누울 자리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