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선언 28돌에 되돌아보는 ‘역사의 가정’···박정희가 육영수 여사 서거때 사임했더라면
제왕적 대통령·제왕적 국회의원 시대에 드는 예비역 장군의 ‘낯선 상상력’
태조가 방원에게·세종이 수양에게 양위했더라면·박정희가 10월유신 안 했더라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예비역 소장] 1987년 6·29선언이 나온 것이 벌써 28년이 되었다. 6·29선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역할이 어느 정도이냐는 장세동도, 박철언도 전모를 모르고,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만이 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질 리는 없을 것이고 노태우를 극적으로 띄우면 승산이 있다는 공리적 판단이 깔려 있었든 아니든, 결과는 온 국민이 환호한 무혈혁명(無血革命)이었다.
설사 6·29의 제기는 노태우에게서 나왔더라도, 그 의의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6·10시민항쟁을 6·29선언으로 結晶시킨 전두환의 결단력은 놀랍다.
흔히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하다고들 이야기하나, 앞으로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정의 노고(勞苦)는 분명히 있다. 이성계가 제2왕후에게서 난 막내 방석을 찍지 않고 왕조 창건의 동업자격인 방원을 찍었더라면 그 처참한 왕자의 난이 잃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병약한 문종에게 넘기지 말고 수양대군에 넘겼더라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귀한 선비가 살아남아 세조의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얼마나 귀하게 쓰일 수 있었을까? 이렇게 가정하는 것이 그저 공론에 그치는 일일까?
박정희가 1971년 3선 개헌을 하지 않고, 아니 1972년 유신을 하지 않고 물러났더라면 하는 가정과 추론도 무의미한 것일까? 박정희가 자의로 물러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1974년 8월15일 일본에서 들어온 자객의 총탄에 맞아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갔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야당도 여장부 박순천과 유진산 등이 중심을 잡고 있던 때여서 후일과 달리 정치가 통하던 때이다. 육영수 여사를 잃은 상처는 온 국민에게 비통의 극이었다.
이때는 박정희가 물러날 명분도 충분하였다. “內子를 잃은 충격이 너무 커서 대통령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5·16혁명동지, 조국근대화의 동업자 JP에게 뒤를 부탁하고 물러났더라면 국민의 안도가 얼마나 컸겠는가?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가 이화장으로 향할 때 연도의 국민들은 눈물로 환송하였다.
박정희가 그때 용퇴하였더라면, 철천지원수(徹天之怨?)를 지은 함석헌, 계훈제, 장준하 등도 용허(容許)하였을 것이다. 이후락, 김형욱은 박정희와 같은 배를 타고 키를 잡은 동지들이 아니다. 이들과 이런 일을 논의할 수는 없다.
오로지 ‘혁명을 함께 시작한’ JP와 ‘혁명의 완성’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3선 개헌을 반대하였던 선비 정구영도 기꺼이 박정희, 김종필에 협조하였을 것이며, 정국은 급속히 안정되고 박정희가 추진하던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중화학공업 건설도 그대로 탄력을 받았을 것이다. 박정희가 아니면 중화학공업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는 무책임하다.
육영수를 잃은 박정희의 심신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려 급기야 10·26의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너무도 허망하고 안타까운 가정이지만, 이러한 허구(虛構, fiction)가 전혀 무의미한 것일까? 헌정과 국군의 명맥이 흔들린 12·12,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국군이 국민에 총을 쏘는 5·18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국회가 부딪치고 있다”는 답답한 정치가 새삼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