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문제, 당리당략 벗어야 해결”
마틴 캐나다 전 총리 밴쿠버 ‘2014 세계납세자연맹대회’ 특별강연
1990년대 재무장관으로 재정개혁에 앞장서 아시아와 일부 유럽국가를 위협했던 외환위기에서 캐나다를 구한 폴 마틴 전 총리는 “지도자의 미래에 대한 혜안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용기만이 국가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주의 이념이 아무리 중요해도 국가역할은 여전히 있다”며 “한국이 직면한 고령화 도전은 당리당략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납세자연맹 운영위원인 이상현 <매거진 N> 기자가 5월31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14 세계납세자연맹대회’에서 특별강연한 그를 취재했다. -편집자
“국가채무 증가는 세대간 균형의 문제다. 여야나 보수 진보간 이견이 있을 리 없다. 1990년대 캐나다가 균형예산 달성과 연금개혁 등 재정건전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들이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에 협력해 왔기 때문이다.”
폴 마틴 전 캐나다 총리는 “1990년대 재정개혁으로 캐나다는 21세게 초 유럽 각국이 겪은 재정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1993년 자유당의 장 크레티앵 내각에서 10년간 재무장관을 지낸 후 2003년 제21대 캐나다 총리가 됐다. 그는 재정지출 삭감과 예산절약을 통해 예산균형을 이룬 정치인으로 꼽힌다. 폴 마틴은 고령사회 문턱에 선 캐나다의 높은 복지수요 유지하기 위해 지출됐던 예산을 삭감하며 정부부채를 크게 줄였다.
지출삭감 등 균형예산으로 위기 넘겨
올해 75세 원로정치인인 폴 마틴은 보수 또는 자유주의 진영에서만 환영받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가 재무장관 시절이던 1996~97년의 캐나다 역시 경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 투기자본이 취약국 통화가치를 붕괴시키며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던 때다. 중앙은행은 화폐금융정책으로 많은 논란을 겪고 경기침체는 심각했다. 그는 경기침체기 정부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상식을 뒤엎고 긴축재정으로 경제정상화를 이뤘다.
무상의료와 높은 수준의 국민연금 등 각종 복지시스템은 고령화사회로 이미 진입한 캐나다에게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폴 마틴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이었다면, 1990년대 이 나라의 재정건전화 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2000년대 중반 유럽을 휩쓴 재정위기는 캐나다에서 더 큰 폭발 잔해를 남겼을 지도 모른다.
폴 마틴 총리는 재임 5년 연속 예산흑자를 달성했다. 정부지출을 크게 줄이고, 중앙은행에서 빌린 국가채무도 갚았다. 상환한 연방부채는 814억 캐나다달러(한화 약 7조6850억원)에 이른다.
어떤 정부부처는 예산 65%를 삭감했다. 폴 마틴의 재정건전화 프로그램 시행 뒤 캐나다 사상 최초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처의 지출이 감소했다. 이렇게 아낀 돈은 연구개발에 투자돼 성장잠재력을 높였다.
“모두가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5년 당시 국민들에게 정부예산균형이 국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끈질기게 설명했다. 진정성을 느낀 국민들이 협조하기 시작했다.”
마틴 전 총리는 “재정문제는 정치와 밀접히 연결돼 있어 정부가 신뢰를 잃으면 회복할 길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재정문제에선 특히 ‘진영논리’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정부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하는 것이며, ‘어떤 세금으로 부채를 갚느냐’의 문제는 ‘누가 부채를 갚아야 하느냐’는 문제와 동일하다”면서 “집권자가 단기적이고 정략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어 때를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방만한 재정은 대외신뢰도 추락 초래
“교육이나 사회 인프라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문제는 균형이다. 세금을 왜 내야하는지 등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는 고통분담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대별로 고통을 나눠 분담해야 한다. 지금 세금을 덜 걷어 덜 쓰는 것은, 비단 다음 세대에게 세금을 덜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마틴 전 총리는 대회에 참석한 한국납세자연맹 김선택 회장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직면해 국민연금의 미래가 아주 어둡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캐나다는 1990년대 국민연금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고 이민을 받아들여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 등 아시아국가들에게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마틴 전 총리는 정부가 신뢰를 받으려면 ‘재정건전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재정이 방만해지면 통화가치는 하락하고 예산수요는 증가한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세금부담은 크게 늘어난다. 환율과 금리는 불안해지며 경제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고 만다. 균형예산이 왜 중요한지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국가’와 ‘공공성’이라는 두 화두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다. 어중간한 언사로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의 박수를 한 번 더 받는 것보다는 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정당하고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교육은 공고육의 보충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민간부문은 경제적 효과 여부를 따라 움직이지만, 중장기적 이익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국가의 몫이며 책임이다. 정부부채도 이런 인프라 조성을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반대할 수만은 없다. 꼭 해야 할 것이라면 국민이 이자를 물더라도 국가가 주도해 조성해야 한다.”
컨퍼런스 질의응답 순서의 풍경은 민주적이다.
우선 수십개 세션에 참가한 청중 대다수가 다른 세션의 기조발제자나 토론자다. 특정세션에서 발표하는 전문가이지만 다른 세션에 참가해서는 열정적으로 배우는 모습이다.
토론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발표석 좌우에 설치된 스탠딩 마이크 앞에 줄을 서야 발언기회를 얻는다. 잊고서 빠뜨린 대목이 있으면 다시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이 줄 맨 앞에 서 있는 피자배달부는 그가 속한 대기업 회장이나 전직 총리보다 더 먼저 더 오랜 시간 연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