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한 오지의 ‘고택마을’
선비 문인의 은둔지 경북 영양 ‘두들마을’…조지훈 이문열 등 배출
험준한 태백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세상으로부터 숨은 듯 자리한 오지가 있다. 경상북도에 위치한 영양(英陽)은 북쪽의 일월산(1219m) 및 통고산(1066m), 동쪽의 백암산(1004m) 등 1000m가 넘는 산들로 에워싸여 개발과 변화의 바람에도 사람들 발길을 쉬이 허락지 않은 곳이다.
높은 산세에 가리어져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 숨어 자리한 영양의 옛 지명은 ‘고은(古隱)’이다.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는 대신 옛 것을 고스란히 지키고 이어가며 변화의 시간으로부터 봉인된 순수의 오지다.
영양에는 예로부터 어지러운 세상사를 피해 은둔하던 선비들이 많았다. ‘지자요수인자요산(智者樂水仁者樂山)’이라 했다. 태백 능선으로 이어진 산과 골짜기, 그리고 그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수많은 계곡이 있어 은둔의 선비들에겐 더 할 수 없이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지리적 고립에도 불구하고 양반문화가 많이 형성되어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영양은 현대문학의 거장을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의 고장이다.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한 오일도는 감천마을 사람이며,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바로 이곳 주실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영양군 석보면에 위치한 두들마을이 고향인 소설가 이문열은 <그해 겨울>,<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통해 고향의 모습을 많이 담아내고 있다. 특히 <선택>을 통해서는 재령 이씨 촌이던 두들마을을 비롯해 선대 장계향(정부인 안동 장씨) 할머니의 삶을 그려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보였다.
이렇듯 마음을 다스리는 산이 있고, 생각을 이끄는 물과 계곡이 넘치는 영양은 은자(隱者)에겐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식처가 되고, 당대 최고의 문인들에겐 생각과 감성을 일깨운 스승과도 같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잊고 지낸 감성과 세상에 지친 마음을 달래려 영양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 양반문화의 멋과 맛…’봉인된 시간여행, 두들마을’
400여년 전통을 지켜온 두들마을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위치해 있다. 마을이 언덕(두들, 경상도 방언)에 있다 하여 ‘두들마을’이다.
석계(石溪) 이시명(1590~1674) 선생이 병자호란의 치욕에 비분강개하여 이곳 석보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두들마을의 역사는 시작된다.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자 재령 이씨촌 마을이기도 한 두들마을에 들어서면 서슬 퍼런 양반가의 권세나 기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소담하면서도 단정한, 잘 정리된 기와채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 고택 마을과 달리 두들마을의 첫 느낌은 봉인된 시간이 풀린 듯 옛 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담장 하나 대들보 하나도 새것이 아니고 문화재로 등록되어 눈요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마을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석계고택은 마을 초입 비탈진 언덕에 놓여 있는데 이시명 선생이 석계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해 ‘석계고택(민속문화재 제91호)’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양반가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 대신 일자형 맞배지붕으로 소박한 모습이 특징이다. 이 집을 지은 이시명 선생과 그의 처 장계향 정부인의 성품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또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석계초당을 중건해 지어진 ‘석천서당’은 대청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백미이다. 고택의 운치와 거슬림이 없는 전경, 나지막한 산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은 이곳을 바라보는 이의 가슴마저 탁 트이게 한다.
잠시 석천서당에서 휴식을 즐기고 발길을 언덕길로 향하면 유우당이란 또 다른 고택이 나온다. 이제껏 보던 고택의 구조인 ‘=’ 또는 ‘-‘형과 달리 ‘ㅁ’자 형태로 높은 석보 위에 집을 짓고 사랑채와 사랑마루가 석축으로 돌출되게 했다. 집의 외형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거북모양의 주춧돌이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사랑마루 아래 놓인 거북 주춧돌을 만지며 건강과 불로장생을 기원했다. 유우당은 원래 석보면 주남리에 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가 두들마을의 지금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아기자기한 고택과 마을의 제사를 모시던 제실, 또 오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기와지붕에 핀 와송 등이 우리 것인데도 낯설고 새롭다. 아니 이보다 더해 옛날 영화나 고전 다큐의 필름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시간과 변화의 흐름에서 봉인이라도 된 듯하다.
두들마을에서 가장 고귀한 역사를 하나 꼽으라면 무엇일까. 이곳에 사는 재령 이씨촌 사람들은 아마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여중군자 ‘정부인 장계향’을 들 것이다. 마을 곳곳마다 세워진 그분의 업적과 삶에 대한 기념관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삶은 ‘음식디미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음식디미방에서 소개된 음식은 맵고, 짜고, 달고 하는 자극적인 맛 대신 식자재 본래 맛을 최대한 살린 우리 고유 음식이다. 음식의 맛과 성질이 차분하고 정제되어 사람의 심성 또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어울릴 수 있게 했으리라.
두들마을에서의 하룻밤은 옛 선인들의 삶과 수백년 세월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시간 속으로의 여행, 이름 그대로다.
* 여행 Tip
1. 두들마을 고택체험과 민박
병암고택, 이원박 고택, 석계종택 백천한옥 4동의 고택에서 숙박이 가능하며, 전통 고택을 개보수한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샤워장 등도 따로 준비되어 있다.
2. 체험 프로그램
고택체험과 함께 영양의 특산물(고추, 사과, 블루베리 등)이 풍성한 ‘석보장터’와 ‘문학 농촌마을 어린이축제’ ‘전통예절’ ‘전통혼례’ ‘천연염색’ ‘천연향 만들기’ ‘전통성인식’ 등의 체험프로그램이 계절별, 월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3. 주변 볼거리
두들 8형이라 하여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있는 8대 경승지로 수천평의 잔디로 덮여 있는 초원 광로산을 비롯해 90m 높이의 언덕 병암산, 항재 이숭일 선생이 글을 새기고 명인지사들의 유상지(遊賞地)로 사용되었던 주남천의 비석 낙기대, 세심대, 동대, 서대가 있으며, 그 외 석천서당, 광록정 등이 있다.
4. ‘음식 디미방’ 체험관
한식 고유의 맛과 멋을 한껏 살린 전통 양반가의 식문화를 즐길 수 있다. 이제껏 맛보지 못한 새로움과 고풍스런 격으로 현대인들에게는 온전하고 완전한 ‘양가 반상’의 경험을 갖게 할 것이다.
<글 사진 이정찬 여행 레저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