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파리의 방랑자’ 김만옥의 ‘내 생애 최고의 날들’

내 생에 최고의 날들

책을 받고 40쪽 쯤 읽은 뒤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는 파리에서 어린 딸을 키우며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딸을 돕는다며 식모살이를 자청하여 파리로 갔다.

식모살이 틈틈이 파리를 즐기는 이야기였다. 잔 재미가 넘치는 이야기를 읽다가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 느닷없이 전화를 건 것이다.

약간의 수다를 떨다 보니 한 주일 전 울산조선소에서 있었던 명명식 이야기가 나왔고?아내 장화자의 God Mother를 했던 이야기며 시인 이제하를 초청했던 것이며, 그에게 가장 단정한 옷 매무새로 오라고 했더니 청바지 청셔츠에 등산모 차림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팔을 비틀어 ‘모란 동백’을 부르게 했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 혼자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머쓱해져 버렸다. 작가의 맞장구가 좀 썰렁해지고 나 혼자 멋대가리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멋쩍게 대화를 끊었다. “너무 내 자랑을 늘어 놓았나?” “제하만 초청을 해서 삐졌나. 그럴 사람은 아닌데” 하며 계속 작가의 파리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하고잽이’ 할머니의 파리 종횡기가 재미있다. 종횡기는 이름 하여 <내 생애 최고의 날들>. 파리는 나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다녀 온 곳이지만 그리고 구석구석 잘 아는 곳이라 자만하고 있었지만 작가가 본 파리의 모습과 느낌은 완전히 다른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물론 흔한 파리 여행 안내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하고잽이’ 할머니는 시간을 금쪽같이 쪼개서 딸의 집안일 도와주고, 손녀의 일상을 돌봐주며, 파리의 구석구석을 보고싶은 대로 보아주며, 그것도 얄팍한 용돈을 아끼려고 돈 안드는 발품으로 파리의 예쁜 곳만 봐 주고 다니는 모습이 어쩌면 딱 김만옥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그만 여인이 그토록 용감한 사람이었던가 하고 놀라기도 했다. 작가의 사유는 파리의 눈에 보이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파리에서 보는 사물과 그것을 뛰어 넘어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연결해서, 마치 몇 십 광년을 여행하여 지구에 도착한 어느 우주 행성의 빛에 실려온 아득한 고대의 행성 이야기처럼 시간과 공간이 널뛰고 있었다. 현자가 파리에서 현신하고 성임의 지나간 이야기가 거기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성임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읽기에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누가 죽었다는 얘기만 들으면 그렇듯, 죽기 전에 차라도 한잔 나누었으면 했지만 이젠 작가의 널뛰듯 오가는 사유의 공간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찬란한 파리의 벚꽃 낙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의 4·19를 연상하고 마산의 3·15로 건너뛰었다. 50년이 훨씬 지난 시간이 건너왔다. 파리의 벚꽃 속에서 느닷없이 “휴학하고 마산에 머물고 있던 공대생 황성혁”의 이름이 톡 튀어 나왔다.

잠깐 이게 누구 이름이지 하고 멍해졌다. 모두 쉬쉬하며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3·15의 뒷 이야기를 마산에서 그를 통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게 내 이야기구나 하였다.

나는 그날 하루의 일을 ‘마산 3·15’라는 제목으로 신동아의 논픽션에 응모하였다가 딱지를 맞았었다. 여석기 선생이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말았다. 아까웠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모호한 경계에 걸려서 선택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럴 만도 했다. 3월15일 그날 하루 있었던 마산의 잡다한 거리의 이야기를 썼지만 내가 투표를 하러 가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데모 군중들을 건너다 보며 그들과 대화하던 내 개인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의 끝도 역시 내 이야기였다.

복학할 준비를 하며 가정교사일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녁때 아이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고 세상이 깜깜해졌다. 바로 옆집, 변절해서 자유당원이 된 국회의원의 집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돌이 날아들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 장독 터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퍽 하고 둔한 소리가 나는가 하면 장이 쏟아지는 소리가 콸콸콸 요란하게 뒤따랐다. 부랴부랴 공부하던 것을 접고 그 집을 나왔다. 골목길만 골라서 그때까지 소란스러운 먼 곳의 아우성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왠 불한당들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서서는 길을 막던 것이었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하며 “손 내놔!” 하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섰던 나의 손을 왁살스럽게 뒤집더니 손 바닥에 전지를 비치던 것이었다.

그들은 깨끗한 손바닥을 확인하고는 발길질하듯 가라고 했다. 옆에서는 누군가가 구둣발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날 시내 곳곳에서 돌을 던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골라내는 사복형사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기서 온전히 돌아왔고 그날 시위 자국이 손에 남은 사람은 그들의 구둣발에 밟히고 있었다.

그날의 깨끗했던 손바닥은 내 일생 동안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나를 응시해 왔다.

작가의 이야기는 4·19로 뛰었다. 그는 하늘을 찌를 듯 잘난 문리대의 여학생 대표로 타 대학과의 연락 책임도 맡았고 학생 데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나중 민간정부 취임식에서 이희승 교수의 경축시까지 읽었다. 잘 하면 문화부 장관 한자리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을 정도로 내게는 그가 출중해 보였다. 4·19 이야기 중 작가는 내무부 앞에서 또 공대생 황성혁을 만났다. 이번에는 T자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T자’라는 단어를 보며 갑자기 내 허파에서 흐느낌이 헉 솟아 올랐다. 평생 나는 사소한 일에 실없이 껄껄거리다가 또 아무것도 아닌 일에 훌쩍거리곤 하였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그 기복이 심해지고 있다고 자각하는 중이다. 아 T자라니.

그 북새통에 길다란 거추장스런 T자를 들고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헤매었다니. 그것이 그때 내 모습이었다
.

그날 공대 대강당에는 공대생 100여명이 모였다. 다른 대학에서 궐기하였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나갈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행동이 느린 공대생다운 미지근한 열기에 싸여 있을 때 마산 친구들이 나서서 “야 너거들 비겁하게 이러고 있을끼가. 나는 마산에서 사람들이 총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왔단 말이다. 나가자.” 그 서투른 선동에 공대생들은 별 토를 달지 않고 모두 나섰다. 신공덕에서 중량교까지 걸어 나왔다. 거기까지였다. 경찰이 막아섰던 것이다. 비실비실 모두 헤어졌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명동 입구로 나와 아무데나 끼어들었다. 의대생들이 앉아 있으면 거기 끼어 앉고 문리대생 데모도 따라가고, 앰블런스가 와서 “피가 부족합니다. 피가 부족합니다” 하면 앰블런스에 뛰어 올라 헌혈을 한 뒤 팔에 남아있는 채혈 자욱이 마치 훈장이기나 된다는 듯 감싸고 다녔다. 그날 그 긴 여정에 T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가정교사 하던 집까지 끌고 왔었다. 그것은 잃어 버리거나 내 버릴 수 없는 내 중요한 재산목록에 들어 있었으니까. 어떤 조직에 들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 그에 따른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할 것인가도 명확하지 않은 채, 거기서 빠지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혹은 뭔가 큰 손해를 볼 것 같은 기분으로 거추장스러운 T자를 끌고 하루 종일 서울 한복판을 헤맸던 것이다.

4·19 혁명 당시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는 학생들

거기쯤 읽고 나서야 작가에게 전화 걸었던 일이며 저자의 뜨악한 반응을 회상하였다. 저자는 내가 나의 이름이 인용된 부분과 그 주변의 일을 읽었으리라 생각하고 작가의 상황 설명에 대한 나의 동의를 기대했던 것이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저자는 내가 그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는 것을, 또 그가 나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말로써 확인해 주기 위해 내가 전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명식 이야기, 제하형 이야기로 수다만 떨고 있었던 것이다. 꼭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비슷한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 세계를 비슷한 방법으로 소화하고 있었다고, 그것을 함께 이해해 왔다고 나는 확신한다.

파리에서의 작가적 산책은 계속되었다. 하고잽이 할머니는 나름대로 멋지게 파리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나도 많이 다녔다. 비싼 호텔에서 묵고, 고급 음식을 먹으며, 휘황찬란한 사무실에서 잘난 사람들과 함께 하느라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자만했었다. 그러나 저자의 발자취와 비교해 보며 “그래 너는 어딜 다녀 왔다는 거야” 하고 묻게 되고 “아무데도 다녀보지 못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정해져 있는 곳을 남이 정해준 시간표에 따라 쫓겨 다녔을 뿐이었다. 내가 가고 싶어 간 곳은 거의 없었다
.

겁도 없이 덤벙거리며 낯선 파리의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행복은 저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지어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같이 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할아버지는 파리를 먼저 떠나며 혼자 남는 할머니를 걱정스러워 하는데, 그 할아버지 떠난 뒤의 자유에 환호작약하는 마음을 숨기고 작별을 섭섭해 하는 척하는 할머니, 그 역설적 사랑. 책의 구석구석을 사랑이라는 음률이 흐르고 있었다. 가난한 딸의 박사학위 준비를 위해 식모살이를 자청하면서도 “딸이 자기를 유인해 단조로운 일상에서 빼돌렸다”고 생각하는 그 여유랄까 배짱이랄까.

파리 몽마르뜨의 화가들

할머니의 서투른 프랑스어 발음에 우쭐거리고 빈정거리며 대놓고 식모대접을 하는 사춘기가 시작되는 어린 손녀에게 등을 돌리고 삐죽거리는 한국의 한다 하는 소설가 할머니의 사랑스런 인내, 처참한 지난 세월의 궁핍조차 따뜻한 추억으로 다독거리는 이 할머니의 손길은? 사랑이라는 말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써늘한 파리의 뒷골목, 별 볼품없는 파리의 공원들도 저자에게는 아름다울 뿐이다. 저자는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연출되는 파리지안들의 애무 장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흘깃거리며 곁눈질을 하며 그 영상들을 머릿 속에 저장하면서도 그러는 걸 또 누가 볼까봐 움찔거린다. 그 모든 범상스런, 때로는 써늘한 장면들이 작가의 따뜻한 사랑의 프리즘에 투과되면 모두 무지개로 쌍무지개로 뜨게 된다. 책의 구석구석을 흐르는 그 흐뭇한 색깔이다.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많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한 턱 쏘라고 할 만큼. 태학사 2012년 4월 간행. (031)955-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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