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군사평론가; 육사 28기, 국방부 군비통제관, 국방부 정책기획관 역임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40) 蘇 휴전협상, 美 수락···’기나긴 전쟁의 서막’

    중공군은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유례없는 대 손실을 입고 전선에서 대규모의 집단이탈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전체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8군은 5월말 현재 고랑포-연천-화천-양구-원통-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공황상태는 1차대전시 니베유 공세가 파국으로 끝나자 프랑스 군내에 반란이 일어난 것에 비유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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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39) ‘밴플리트 탄약량’···하룻밤새 50억원 어치 포탄 퍼부어

    밴 플리트 장군은 와해된 3군단을 해체하여 미 9군단과 한국군 1군단에 편입함과 동시에 미 3사단과 187공정연대를 투입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한계리에서 하진부리와 강릉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재편성 중에 밴 플리트 장군은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분량의 포탄을 발사하도록 승인하였다. 이 조치로 유엔군은 전투 간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기준량의 5배를 초과하는 포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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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8) 한국군 최대 굴욕 ‘현리전투’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가 시작되던 1951년 5월 16일 밤 3군단은 현리 동쪽 가로리-가리봉 사이의 26km에 달하는 정면에 9사단을 왼쪽, 3사단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있었다. 현리는 군단 지역 내 유일한 통신 및 보급 기지이면서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도로망이 거의 없었으며 왼쪽 인접 군단인 미 10군단 지역을 통하여 주보급로와 연결되었는데, 그 사이에는 애로(隘路)가 하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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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7) “항복을 허락한다”

    수차례의 공세작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서부의 13병단을 뒤로 돌리고 1951년 2월 새로 도착한 3병단과 19병단, 그리고 장진호전투 이후 전력을 보강한 9병단을 전선에 투입하여 1951년 4월말 총 70만명을 전선에 전개하고 두 차례에 걸친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메이데이 이전에 서울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한반도 포기를 강요하고, 최소한 휴전을 협상하기 위한 막후교섭에서 유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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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6) 3·14 서울 재탈환과 맥아더 해임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가 지평리 등에서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패퇴하자 리지웨이 장군은 작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9군단과 10군단으로 단계적 제한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2월 21일을 기하여 양평-횡성-원주-강릉 진출을 목표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66군, 39군 및 40군이었다.? 2월 28일까지 8군은 횡성-원주 일대의 적을 소탕하였는데 7일간의 작전에서 5000여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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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1조달러 퍼부은 미국 제압한 ‘베트남영웅’ 지압 장군

    ‘붉은 나폴레옹’ 보구엔 지압(武元甲) 원수가 지난 9월 102세로 서거하였다. 지압은 1950년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1960-70년대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물리친 영웅이었다. 고등학교 역사선생이었던 지압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바 없었으나 세계 강대국의 내로라하는 장군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그의 전술원칙은 단 하나, “적이 원치 않는 때와, 장소에서, 적이 원치 않는 방법으로 싸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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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5) ‘지평리 전투’, 릿지웨이의 진면목

    신정공세(新正攻勢) 이후 남진을 계속, 1월 초 수원-이천-원주-평창-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남하한 중공군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기동이 제한되고 보급마저 원활하지 못하자, 일단 이 선에서 남진을 멈추고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였다. 1월 25일 리지웨이 장군은 서부전선의 1군단 및 중부전선의 9군단에 수원-과천 축선으로 하여 한강을 목표로 한 진격을 명령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 및 50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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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4) 가슴에 수류탄 2발 ‘리지웨이’

    1950년 12월 29일 미 합참은 새로운 정책결정과 전략계획을 요구한 맥아더 장군에게 “유엔군의 전력보존에 유의하여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되, 일본방위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한반도로부터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종적 기회를 사전에 결정하여야 한다. 단, 철수개시에 관한 지시는 이에 대한 귀하의 건의를 접수한 후 차후에 하달할 것“이라는 훈령을 하달하면서, 이에 덧붙여 ”그러나 유엔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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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3) 1·4후퇴 열흘 전 이승만 ‘220만 서울시민 피난령’

    청천강와 장진호에서 세계 최강의 미군을 격파함으로써 자신을 얻은 중공군은 급기야는 한반도와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중공이 합법정부로서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로써 이 무렵 휴전안을 모색하고 있던 서방측에게 굴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측이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으로 38도선은 말살되었으니 이번이야말로 북한군이 실패한 한반도의 무력적화를 성취할 때가 왔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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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2) 독선·편견으로 중공군 개입의도 오판

    미 8군과 10군단을 연결시키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실수이나, 그보다 근본적인 실패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본 전략정보 판단상의 실수였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 정보기관 모두 이 책임에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1950년 10월 25일 서부에서 진격 중이던 한국군 1사단이 낯선 군복차림에다 말이 통하지 않는 1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만주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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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1) 교통사고 워커 후임에 릿지웨이 임명

    12월 15일을 전후하여 임진강~38도선을 연한 방어선으로 철수한 8군은 미 1군단의 25사단과 한국군 1사단을 문산~서울 축선에, 미 9군단의 한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을 철의 3각지~서울 축선에, 한국군 2사단, 5사단, 8사단을 춘천~원주 축선에 배치하여 일련(一連)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2월 20일경 묵호와 부산에 상륙했던 한국군 3사단과 9사단이 북상하여 태백산맥 以西에는 한국군 3군단이, 이동에는 수도사단을 기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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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0) 미군의 작전상 후퇴?···’일본군 옥쇄’와는 너무 달랐다

    8군의 우측방을 지키기 위해 2사단이 치룬 대가로 1군단과 9군단은 11월 30일 청천강을 도하하여 숙천(肅川)~순천(順川)선에서 급편방어선을, 다시 12월 3일에는 순안(順安)~성천(城川)선으로 철수하여 평양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성천이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평양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파국을 면하는 것은 즉각적인 철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 맥아더 장군은 38도선으로 총퇴각을 결심하였다. 8군은 우세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신속히 전선을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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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29) 미 육군 초토화, 그러나 Chosin Few는 전설로 남아

    11월 27일 중공군 9병단 예하 79, 89 및 59의 3개 사단이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해병 1사단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 후방에서는 58 및 76사단이 하갈우리에서, 60 및 77사단이 고토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철수해 오는 미 해병대를 노리고 있었다. 꼼짝없이 8군의 2사단이 당한 것과 같은 인디안 태형이 시작될 판이었다. 영하 20~30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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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8)’맥아더의 신화’ 무너지다···인디언 태형처럼

    1950년 10월 하순 압록강으로 진출하려는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1차 공세의 목표를 달성한 중공군은 11월 6일 새벽 전체 전선에 걸쳐 일부 병력만 남겨놓고 주력은 재편성을 위하여 일제히 잠적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엔군이 철수하거나 협상을 제기하는 등의 반응이 있지 않을까 주시하면서 9병단의 12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새로이 투입하여 2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가능한 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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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7)이승만 10.27 대대적 개선행사···파국의 시작

    유엔군은 1950년 10월 23일 청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24일 맥아더 장군은 9월27일 합참에 의해 설치되었던 정주~영변~함흥을 잇는 북진한계선(일명 맥아더라인)을 철폐하고 전군에 압록강 선으로의 총 진격을 명하였다. 사기충천한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이 끝날 것이며, 크리스마스는 본국에 돌아가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전세를 낙관하였다. 심지어 유엔군은 이때부터 종전 후의 부대 재배치 문제를 거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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