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군사평론가; 육사 28기, 국방부 군비통제관, 국방부 정책기획관 역임
  • [김국헌의 직필] 일본 길들이기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일관계의 근저를 흔드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전범이 봉안된 야스쿠니 신사를 수상이 참배한다는 것은 연합국이 일본에 찍은 침략국의 낙인을 거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각료는 입국을 거부하겠다고 나왔다. 일본의 침략과 만행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이 이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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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독일 통일의 교훈

    독일통일 문제는 마가렛 대처가 끝까지 자기류의 해결을 고집하였으나 주장이 관철되지 아니한 경우다. 조지 부시나 유럽의 지도자들, 심지어 영국 외무성도 독일의 통일이 불가피하다면 통일된 독일을 통합유럽연방에 붙들어 놓아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반해, 대처는 독일이 일단 통일되면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이 유럽에 어떤 방식으로든 미치게 되고 결국 독일이 유럽의 헤게모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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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대처 “머리 굳은 사람들 갖고는 개혁 어렵다”

    1979년 겨울에 이르러 영국 정부의 기능은 마비된 상태에 이르렀다. 캘러헌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는 311대310으로 부결되었다. 2차대전 후 노동당 애틀리 정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모토 아래 사회복지국가를 표방하였다. 당시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사회주의적 가치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평등한 분배’는 ‘작은 분배’가 되기 쉬었고 ‘세계의 공장’ 영국의 산업은 낙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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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법과 원칙의 관철···대처와 카터의 경우

    북아일랜드 문제는 영국 정부와 국민이 오랫동안 시달려온 문제였다. 북아일랜드 문제의 복잡성은 그 지역이 아일랜드의 일부이면서 주민의 다수는 영국계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영국 정부로서는 북아일랜드를 포기하자니 영국계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북아일랜드를 유지하자니 아일랜드계의 끊임없는 테러로 국력소모를 계속해야 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처해 있었다. 12세기 아일랜드가 잉글란드에 병합된 이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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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대처의 ‘철의 여인’은 거저 얻은 명성이 아니다

    대처의 과감한 경제정책에 대한 가장 크고 완강한 저항은 1985년 탄광노조 파업이었다. 1년여 끈 파업에서 극단 노조 지도자들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하고 대처의 원칙과 주장이 승리하게 된 것은 영국의 노동운동 나아가 노조와 정부와의 관계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긋는 사건이었다. 영국의 탄광노조는 단순히 대규모 산업노조에 머물지 않고 사실상 노동운동을 이끌어 왔으며 나아가 노동당과 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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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송요찬의 탄식, ‘한빛부대 하필 日자위대한테 탄약 빌리다니···’

    12월 호국인물로 송요찬 장군이 선정되었다. 송요찬 장군은 4·19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데모대가 경무대로 육박하는 가운데 급박해진 경찰이 실탄 지급을 요구해왔다. 당시 군은 M-1 소총을 주로 사용했는데 비해 경찰은 칼빈 소총을 사용하였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에 M-1 소총 탄약을 지급도록 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로써 경찰 발포로 인한 희생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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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전작권 전환’ 노무현보다 직언 못한 국방장관 잘못 커

    한미동맹은 1954년 성립되었지만, 국군과 미군의 협력을 구체화할 한미연합사는 1978년 창설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한미동맹을 착안하고 관철해냈다. 자주국방의 의지가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군사문제에 정통한 박정희 대통령도 연합사 창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가능할는지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추진하여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는 大役事를 이루어낸 것은 유병현 장군이다. 유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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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전우애

    한미동맹의 바탕은 군사동맹이다. 미국통 국제정치학자나 언론인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핀치 펜’은 일본이며 한국에서 미국은 언제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동맹의 가치와 무게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폭격기나 항모보다도 군사연습이다. 한미연합사에서 이루어지는 군사연습을 통하여 한국군은 미국의 세계적 군사체제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공군기에 급하게 수리부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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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7)반공포로 석방

    포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교착상태에 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자 한국정부의 휴전반대운동은 절정에 달하였다. 1953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장병들에게 “국토의 통일이 없는 휴전보다는 차라리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택해야 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이승만은 4월 24일 미 국무성에 보낸 메시지에서 “만일 미국이 압록강 남쪽에 중공군을 주둔케 하는 어떠한 협정이라도 체결할 경우 본인은 한국군을 유엔군으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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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6)금성전투···”유리한 휴전조건 위해 더 많은 피가 요구됐다”

    1953년 봄 중공군은 전체 전선에서 전초고지들을 목표로 1개 대대나 1개 연대 규모로 국부적 제한공세를 가해왔다. 국군은 이들 고지들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일러 8군사령관은 이들 고지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는지 냉정히 판단하면서 고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밴 플리트가 기회만 주어지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던 데 비해, 테일러는 인명손실을 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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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테이어 대령과 웨스트포인트 ‘명예제도’

    ‘테이어 제도’는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교장을 역임하여 미 육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Sylvanus Thayer 대령이 미 육사에 정립한 교육제도 및 방법이다. 테이어 제도는 불확실한 상황과 불시의 적으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수호해야 할 군의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적성 및 자질-국가에 대한 의무감, 헌신성, 명예심, 절대적정직성, 군사적 전문지식-을 교육하고 체질화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교수부에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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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4)클라크 장군의 확전구상

    전선의 교착이 계속되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대규모 작전으로 전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그는 1952년 10월 초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유엔군이 휴전회담을 조속히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공산군에 대한 군사적 압력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공산측이 유엔군의 휴전조건을 수락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대규모작전이 필요하다”면서 20일간에 걸친 3단계 작전으로 평양~원산을 목표로 한 지상군의 포위공격, 수륙양면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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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3) 저격능선 전투

    1952년 10월에 이르러 밴 플리트 장군은 금화 북쪽의 오성산과 삼각고지~저격능선을 확보하여 위협이 되고 있는 중공군을 제압하기 위해 9군단으로 하여금 삼각고지~저격능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8군은 16개 포병대대와 전투기 200회 출격의 화력지원을 계획하였고 9군단장 젠킨스 장군은 5일 이내에 목표를 탈취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러나 백마고지 전투로 포병 및 공중지원이 계획에서 벗어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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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2) 백마고지 전투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중공군이 공세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였다. 백마고지(395고지)는 철원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통제하는 주요한 전초고지였다. 9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으로 10월 6일 밤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지를 수없이 뺏고 뺏기며, 밀고 밀리는 육박전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명의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파상공세를 계속해 왔다. 혈투는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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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1) 합참역할이 전쟁 승패 ‘좌우’

    1951년 6월 말 미 8군은 총 55만명의 병력으로 46만명으로 추산되는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7월 초 밴 플리트 장군은 일련의 제한공격을 결심하였다. 10월 초까지 8군은 전 전선에서 유리한 중요지형을 확보함으로써 38선 북쪽에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에 접어들자 전 전선에서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반격이 저지되자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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