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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의 사람읽기·이철용③] 브라보 마이 라이프..”병마에 끌려가기보다 노래 맘껏 부르다 가겠다”

2023년 5월 31일 저녁, 서울 목동 한국방송회관 코바코홀. 무대 위에 선 이철용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공연 이름은 ‘이야기하는 소리꾼 이철용의 Talk and Music’, 제목은 ‘Bravo My Life’였다.

구두닦이 왕초, 야학 운영자, 빈민운동가, 소설가, 국회의원, 장애인운동가, 역술인. 이철용의 이력은 이미 여러 번의 변신을 거쳤다. 그러나 그날 무대는 또 다른 출발이었다. 그는 파킨슨병 진단 뒤, 병에 끌려다니다 생을 마칠 것인가,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고 했다.

답은 노래였다. “불치병에 끌려다니는 삶보다 노래 부르다 가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는 노래반주기를 들인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도 30곡가량을 불렀고, 괜찮은 날에는 100곡까지 불렀다. 평균 40곡씩, 몇 해 동안 3만곡 가까이 불렀다고 했다. 타고난 재능은 1%, 연습과 노력은 99%라는 그의 말은 노래에도, 정치에도,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래는 그에게 혼자 견디는 방식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었다. 전국을 돌며 노래하고, 노인들과 함께 흥을 나누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무대에 설 자리를 만들고 싶어 했다. 나를 오라고 하는 곳이라면 다섯 명이 있어도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노래와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노인회관의 노래잔치에서 흥과 끼를 마음껏 풀어놓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보며 “지나온 세월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썼다. 제주 4·3의 기억도 세월 따라 더 커지고 들불처럼 번진다고 적었다. 노래는 이철용에게 추억을 달래는 일이면서, 잊힌 사람의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었다.

2023년 5월, 제주도에서 찾은 당시 5살 음악천재 김선재군. 이철용은 “장차 대한민국을 빛낼 큰재목입니다. 여러분들이 가꾸어 주십시요”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제주에서 노래 재능기부를 하다가 만난 여섯 살 김선재군의 이야기도 그답다. 아이는 음감과 음정에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고, 요즘은 ‘통영개타령’을 배운다고 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청을 돋우는 아이를 보며 이철용은 “타고난 소리꾼은 틀림없다”고 썼다.

그는 이름난 사람만 찾지 않는다. 숨은 손재주를 지닌 예술가, 노인회관에서 신명 나게 노래하는 어르신, 아직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도 먼저 눈길을 준다. 버려진 돌과 외면받은 나무를 다듬어 작품과 보석으로 만드는 이름 없는 예술가를 소개하며, 그를 찾아낸 사람의 눈도 예술이라고 했다.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 역시 그에게는 복지의 부속물이 아니었다. 장애인을 돕는 대상에만 가두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무대에 서는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23년 코바코홀 공연에도 장애인 예술단체 비욘드무용단이 함께했다.

그는 “장애를 당하면 제일 먼저 잊는 것이 춤”이라고 했다. 그 말에는 움직임을 잃은 몸이 아니라, 다시 움직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다.

이철용이 가난을 바라보는 눈도 같은 곳에 닿아 있다. 그는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철용 사람읽기

1991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기 전, 그는 유엔기구 유니세프 초청으로 베트남을 찾았다. 관계부처 장관급 인사들과 한국과 베트남의 현안을 나누고, 열악한 산부인과 보건진료소와 유아원, 가정집을 방문했다. 국가 간 관계가 열리기 전부터 그가 본 것은 회담장의 의전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그는 최근 아시아엔에 쓴 글에서도 서울역과 공원을 떠도는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빈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시원과 쪽방, 지하방으로 흩어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밀려나는 사람은 남아 있다.

안성기씨와 부인 오소영씨는 이철용씨의 소개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오소영씨는 조문 온 이씨에게 “선생님 덕분에 좋은 남편을 만났다”며 “많이 뵙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이상기>

지난 1월, 나는 이철용과 함께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안성기 배우의 빈소를 찾았다. 이철용은 강릉에서 직접 차를 몰고 올라와 나를 태웠다. 시속 40㎞를 넘기지 않는 조심스러운 운전이었다. 몸이 불편한데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빈소에서 안성기 배우의 부인은 이철용의 손을 붙들고 울었다. “선생님 덕분에 좋은 남편을 만났어요.” 두 사람의 만남에는 이철용의 소개가 있었다. 그는 정치와 운동의 현장에서만 사람을 잇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혼과 가족, 삶의 인연에도 그렇게 남아 있었다.

지금 이철용은 전동차 없이는 먼 이동이 쉽지 않다. 엊그제 통화에서도 그는 동갑내기인 부인이 자신을 보조하느라 힘들다고 했다. 예전처럼 강릉에서 서울까지 차를 몰고 사람을 찾아가기 어려운 몸이 됐지만, 사람을 만나고 노래를 들려주고 새로운 재능을 찾아내겠다는 마음은 놓지 않았다.

두 아들의 이름에도 그의 인연이 남아 있다. 큰아들 정민은 박형규 목사가 지었다. 바를 정(正), 백성 민(民)이다. 작은아들 정국은 문익환 목사가 지었다. 바를 정(正), 나라 국(國)이다. 한 아이의 이름에는 백성을 바르게 섬기라는 뜻이, 다른 아이의 이름에는 나라를 바르게 세우라는 뜻이 담겼다.

이철용은 사람을 만날 때 상대를 자기보다 아래에 두지 않는다. 노숙인에게는 왜 거리에 나왔는지 묻고, 장애인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듣고, 노인에게는 노래 한 곡을 청하고, 아이에게는 재능을 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사주를 봐주고, 침과 지압을 배우고, 이발도 해주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했다.

그에게 흥은 고단한 삶을 견디는 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철용을 높여 말하면 그는 “넘 뛰었네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는 금세 자기 장단을 붙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공중부양과 축지법을 번갈아 나누면서 우리 서로 손잡고 춤을 춥시다. 껑충껑충,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들썩들썩 훠이훠이.”

그는 글로 꼬방동네의 문을 열었고, 정치로 국회의 계단을 두드렸으며, 노래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풀고 있다.

이철용의 삶은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이력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일으키고, 한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 노인의 노래를 듣고, 한 가족의 인연을 이어주는 일로 계속된다.

그의 말대로 답은 현장에 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늘 사람이 있다. <이상기의 사람읽기>는 한 인물을 한 번 소개하고 끝내는 연재가 아닙니다. 우기복, 유용원, 이철용 등 이미 등장한 인물들도 새로운 이야기와 기록이 발견되면 다시 찾아가려 합니다. 사람의 삶은 한두 편의 글로 다 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번 회로 이철용 편은 일단 마무리하지만, 새로운 이야기와 기록이 더해지면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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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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