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발행인 칼럼] 유가협 40년…보고 싶다는 말이 민주주의가 되기까지

유가협 40주년 포스터

세상에는 생기지 않았어야 할 단체가 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줄여서 유가협도 그런 곳이다. 자식이 고문받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 부모들이 거리에서 만날 이유도 없었다.

유가협은 1986년 8월 12일 만들어졌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우리는 몇몇 이름을 기억하지만 그 뒤에는 이름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유가협의 40년은 바로 그들의 세월이다.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은 정치가 아니다. 이념은 더욱 아니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가.”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 “다시는 다른 집 자식이 그렇게 죽지 않게 해달라.” 출발은 이처럼 단순하고 절박했다.

하지만 권력이 그 질문에 답하지 않을 때 슬픔은 행동이 된다. 한 가족의 한(恨)은 다른 가족의 한과 만나 연대가 됐고, 연대는 마침내 제도를 움직였다.

그 절정이 국회 앞 422일이었다.

1998년 11월 4일 유가족들은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 천막을 쳤다. 두 번의 겨울을 길거리에서 보냈다. 당시 보도를 보면 민주화운동 유가족 350명과 의문사 유가족 42명이 농성에 참여했다. 마침내 1999년 12월 28일 국회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유가족들은 이틀 뒤 천막을 거뒀다.

거리의 눈물이 법률이 된 순간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유가협 40년의 가장 큰 의미를 찾는다. 민주주의는 국회와 정당과 선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가 외면한 죽음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 권력이 답하지 않는 질문을 되풀이하는 시민, 그리고 마침내 국가로 하여금 그 질문에 답하게 만드는 과정 역시 민주주의다.

40년 동안 축적된 유가족들의 구술과 기록, 의문사를 세상에 알린 방법, 시민사회의 연대, 422일 농성과 법률 제정 과정, 진상규명위원회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해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세계와 공유하면 어떨까.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유가족들에게 한국의 경험은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는 이미 유가협 관계자들의 상당한 구술기록도 축적돼 있다. 이것이 유가협 40년이 과거를 추모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본문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8월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40주년 기념 오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유가협의 40년을 무조건 성역화할 필요는 없다. 유가협 역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적 언어와 이념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어느 운동이든 특정 정치세력이나 이념에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순간 사회 전체의 기억이 한 진영의 기억으로 좁아질 위험이 있다.

40년을 맞은 지금 유가협이 더욱 소중히 지켜야 할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왜 죽었는가.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책임은 밝혀졌는가. 그리고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이 질문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뀐다고 답이 달라져서도 안 된다. 국가권력 앞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의 가장 낮은 바닥이자 가장 높은 천장이다.

눈을 세계로 돌리면 유가협은 결코 한국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에는 ‘5월광장 어머니들’이 있다. 군사독재 시절 사라진 자식들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들이 197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4명의 어머니였다. 그들은 진실과 기억, 정의를 요구했고 그 하얀 머릿수건은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이 됐다.

튀르키예에는 ‘토요일의 어머니들’이 있다. 강제실종된 가족의 진실을 요구하며 1995년 이스탄불 갈라타사라이 광장에서 침묵농성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아르헨티나 5월광장 어머니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가족의 슬픔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의 인권운동을 낳은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광장과 이스탄불의 광장, 그리고 서울 여의도의 천막은 그렇게 이어진다.

이제 나는 유가협의 다음 40년이 꼭 한국 안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국식 유가협’을 다른 나라에 그대로 이식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가 다르고 정치 상황이 다르며 희생의 원인도 다르다.

대신 경험을 나눌 수 있다.

40년 동안 축적된 유가족들의 구술과 기록, 의문사를 세상에 알린 방법, 시민사회의 연대, 422일 농성과 법률 제정 과정, 진상규명위원회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해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세계와 공유하면 어떨까.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유가족들에게 한국의 경험은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는 이미 유가협 관계자들의 상당한 구술기록도 축적돼 있다.

이것이 유가협 40년이 과거를 추모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가협이 80년, 100년을 맞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서는 안 된다.

좋은 민주주의는 유가협 같은 단체가 계속 새 회원을 맞아야 하는 사회가 아니다. 국가 때문에 자식을 잃고, 그 부모가 진실을 밝혀달라며 다시 거리로 나서야 하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사회가 좋은 나라다.

먼 훗날 유가협이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가협이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일 것이다.

그래도 기록은 남아야 한다. 이소선과 박정기와 배은심의 이름도, 우리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도 남겨야 한다.

그것은 어느 진영의 역사가 아니다.

보고 싶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국가에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를 한 걸음 움직인 역사다.

유가협 40년. 그 세월을 ‘민주주의를 만든 부모들의 40년’이라고 부르고 싶다.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을 애도하며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박종철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 박정기는 이후 유가협과 함께 진상규명과 민주주의를 위한 길에 섰다. 한 청년의 죽음에서 시작된 물음은 유가협 부모들의 끈질긴 싸움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제도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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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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