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의 밧줄…자유를 지키기 위한 구속

영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장면을 보았다. 선원들은 귀에 밀랍을 넣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디세우스는 달랐다. 그는 듣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귀를 막지 않았다. 대신 선원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으라고 했다.
세이렌의 노래가 들려왔다. 오디세우스는 몸부림쳤다. 자신을 풀어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의 명령대로 밧줄을 더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배는 세이렌의 섬을 지나갔다.
영화에서는 선원 가운데 한 사람이 밀랍을 빼고 노래를 들었다. 그는 노래를 들은 뒤 죽었다. 반면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묶여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묘한 장면이었다. 자유로워진 사람은 죽고, 묶인 사람은 살았다. 그때 밧줄은 단순한 구속이 아니었다. 밧줄은 구속이면서 동시에 생존 장치였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욕망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을 묶어놓았다. 아마 이것이 오디세우스가 영웅인 또 하나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웅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질 순간을 미리 알고 스스로를 묶을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 장면을 근대사회의 모습과 연결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만 행동할 수 없다. 선원들은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노래를 듣지 못한다. 한 사람은 듣고도 움직일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움직이면서도 듣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이 장면에서 노동과 지배, 욕망과 억압, 근대적 인간의 탄생까지 읽어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우리도 살면서 스스로를 묶는다는 생각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정하는 것. 화를 내기 전에 잠시 말을 멈추는 것.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지 않는 것. 어떤 사람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는 것.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고 하루를 기다리는 것. 겉으로 보면 모두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제한이 우리를 지켜준다.
젊을 때에는 자유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자유로운 경우가 있다.
오디세우스에게 밧줄은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세이렌의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듣고 싶다는 욕망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 욕망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았기에 몸을 묶었다.
삶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서 살아남기도 하지만, 때로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묶는다.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묶고, 가족을 위해 욕망을 묶고, 직업을 위해 행동을 묶는다. 사회적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도 한다.
그것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묶이면 삶은 감옥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묶지 않으면 삶이 파괴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묶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누가 나를 묶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위해 나 자신을 묶었는가.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묶었다. 우리는 무엇을 피하기 위해, 혹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묶고 살아가는가.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스스로 묶어야 하는가.
오디세우스가 남긴 것은 아마 밧줄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밧줄은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때로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를 묶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