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사람세계

[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29] 수이푼 강가의 이상설…연해주에 남은 고려인의 역사

아무르에서 만난 멋쟁이 러시아정교 성직자

러시아인들은 하바롭스크를 극동 러시아의 중심이며 자존심이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가 동해(일본해)의 진취적 해양도시라면,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는 웅장한 아무르강의 개척도시였다. 오늘 우리가 목적지로 삼은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는 연해주 수이푼강 유역의 풍요로운 농업 도시라 말할 수 있다.

거구의 러시아 정교 복장을 한 성직자와 이슬람식 모자를 착용한 그 동료를 하바롭스크 아무르(흑룡강) 강변에서 만났다. 하얀 수염에 지팡이와 검은 복장이 이채롭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기꺼이 촬영에 응하며 친밀한 자세를 취해 준다. 이 친밀한 태도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러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근면한 모습에서 생긴 것인지, 최근 불기 시작한 한류에 기인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도 우리가 만난 러시아인들은 한국을 우호적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바롭스크 러시아정교회 성당, 외부는 정사각형-의자 없는 내부

‘러시아정교’는 크리스도교가 러시아에 포교되어 AD 998년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수용된 것에서 출발한다. 슬라브의 민족적 색채를 가미하면서 국교가 되었고, 러시아 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기간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구한말 조선인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려면 러시아정교로 개종해야 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에 적을 두어야 했다. 정교분리의 현대 러시아라지만 아직도 정신세계는 러시아정교의 영향 아래 있다. 특이한 것을 발견한 동료 L이 말한다.

“러시아정교회 성당은 모두 정사각형의 입구이며, 성당 내에도 앉을 의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살펴보니 과연 그랬다. 친구의 예리한 관찰력에 공감이 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마음으로 성당 내에 앉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이해가 가는데, 정사각형 건물 외관에 관해서는 더 알아보기로 했다.

1880년대 러시아정교 성당 내 고려인 학교

답사가 진행되며 러시아인의 사회심리적 특성에 하나씩 적응하게 된다. 대체로 슬라브 사내들은 백인 우월주의가 몸에 배어 황색인에게는 아는 척을 잘 하지 않는다. 아무리 경제가 무너지고 지갑이 헐거워졌어도 좀처럼 굽신대지 않는다. 표정이 무심하고 경계하는 눈빛이면 그는 자기 일에 매우 열중하는 사람이다. 미국인처럼 사교적이거나 일본인처럼 과잉 친절을 보이지 않는다. 화난 표정 같은 예전의 한국인과 유사하다.

러시아인은 마음의 문을 열고 친교가 생겨야 비로소 미소를 짓는다. 가장 가까운 친구끼리만 격한 허깅(포옹)으로 끌어안는다.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대륙인의 특징이다.

하바롭스크 역사 앞, 러시아 청년과 함께

하바롭스크 일정에 도움을 준 러시아 운전기사 청년과 하바롭스크 역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본인 스스로 촬영을 요청하는 것인데 특이한 경우라 한다.

그는 운전을 시작할 때부터 태도가 달랐다. 차는 깨끗이 세차되어 있고 실내는 청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짐을 옮겨 실을 때도 달려 나와 가방을 들어 올린다. 승차할 때에도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준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한눈을 팔고 있는 적이 없었다. 이런 것이 서비스를 기본으로 하는 상업주의의 본질인데 러시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행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이 청년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하바롭스크의 아쉬운 일정을 마치고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우수리스크로 돌아간다. 이동은 야간열차 침대칸 쿠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세련된 여성 승무원 ‘빅토리야’가 맞이하고 있다.

친숙한 눈인사를 보내며 나그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준다. 4인승 침대칸 쿠페는 이번에도 우리 두 사람이 독차지해 쾌적함을 제공해 주는 행운을 누렸다.

‘우수리스크’와 그 외곽 ‘추풍(수이푼허/綏芬河)’ 지역은 고려인(러시아 국적 조선인)과 망명 지사들에게는 어머니 품 같은 땅이다. 이 풍요로운 지역은 그들을 부양했고 보호해 주었으며 교육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준 곳이다. 이곳은 고대 발해 왕조의 영토로 ‘솔빈부’라 불렸으며 이후 명나라, 금나라, 청나라의 영토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된 황금의 평야지대이다.

우수리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만주 구간의 연결지이며 중국 하르빈으로 빠져나가는 교통의 핵심 지역이었다. 북만주로 연결되는 소만 국경 지역이라 언제든 국제 왕래가 가능하다. 안중근 의사의 하르빈 의거도 그 출발 지점은 우수리스크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수리스크를 통해 연해주로 들어오거나 하르빈(哈爾濱)으로 왕래했다.

그 외곽 추풍 지역에는 수이푼허(綏芬河, 수분하)라는 강이 흘러 수량이 풍부하고 주변에 비옥한 농토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농업을 주로 하는 고려인들이 1870년대 이주 초기부터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정착한 대지였다. 수이푼 지역의 풍요와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역사의 명소이다.

1937년 9월 9일 새벽, 비극적인 고려인 강제이주가 최초로 시작된 통곡의 땅도 라즈돌노예 역, 수이푼허 하류 지역이었다.

열차 화물칸에 실려 가는 고려인 /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독립운동사에 많이 언급되는 ‘수이푼허’라는 지명에 관해 의문이 많았다. 이 의문은 답사를 통해 서서히 풀려 나갔다. 수이푼허(綏芬河/수분하)는 중국식 발음이고 고려인(조선인)들은 추풍(秋風, 수이푼)이라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라즈돌나야강(Раздольная)이라고 부른다.

이 강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수이푼허(수분하)시를 거쳐 연해주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예를 지나 동쪽 블라디보스토크 앞 아무르만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수이푼허와 우수리강(烏蘇里江)을 동일한 하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이푼허는 중국 길림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로 빠져나간다. 우수리강은 연해주 시호테알린 산맥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우수리강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강(흑룡강)과 합류하여 오호츠크해로 빠져나간다. 두 강은 합류하거나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수리스크를 통과하는 수이푼허(라즈돌나야강)

수이푼허(수분하, 라즈돌나야강)는 중국과 러시아에 걸쳐 있는 국제하천이기 때문에 양국에서 서로 다른 지명과 명칭으로 부른다. 여기에 추풍(秋風, 중국어로 수이펀)이라는 한국식 발음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마치 ‘한강’을 남한강의 발원지에서는 영월 동강, 여주 쪽에 이르면 여강, 서울 성동에서는 동호, 마포에서는 마포강이라 부르는 이치와 같았다.

수이푼허 유역의 중심 도시가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 소왕령)’이며 하류의 광활한 평야지대가 라즈돌노예 역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것이다.

새벽에 도착한 우수리스크 역은 여명에 갇혀 어둠이 어슴푸레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역에 기다리고 있는 검은 차량으로 바꿔 타고 바로 추풍 지역으로 향했다.

검푸른 수이푼허, 새벽녘의 세찬 바람을 뚫고 어둠이 서려 있는 강가에 도착했다. 익숙한 안내자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장소였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수이푼

강변에 외롭게 서 있는 석조물 앞에 이르러 이곳이 헤이그 평화회의 비밀특사 이상설 열사의 기념비임을 알게 된다. 조선의 천재, 정통 관료이며 다재다능한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망명 후 전 세계와 북만주, 연해주를 떠돌며 무력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했다.

1917년 3월 최후를 이곳 수이푼(추풍)에서 맞고 수이푼강에 그 유골을 뿌려 달라고 동지들에게 유언했다. 조국 독립을 이루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조국에 갈 자격이 없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올곧고 겸손한 천재 이상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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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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