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만주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 알렉산드르 게른그로스(1851년~1920?)이다. 오늘의 하바롭스크 탐사는 군인 게른그로스의 흔적을 따라 아무르와 북만주의 제국주의 역사를 찾아보는 일정이다.

게른그로스의 트레이드마크는 ‘동청철도경비대’라는 조직이었다. 철도경비대는 점령군이나 정규군이 아닌 치안 유지 성격의 군 부대였다. 그 영향력은 만주 전역에서 만주군벌과 마적단, 조선 독립군, 일본군, 그리고 민생 전반에까지 미치는 핵심 조직이었다.
한국 현대사에도 그와 유사한 조직이 있었다.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철도 시설 파괴와 화물 약탈이 빈번하던 시기였다. 1946년 미군정은 철도 치안을 담당하는 ‘철도경찰대’를 교통부 산하에 창설했다. 무장을 갖춘 1만 명 규모의 이 거대 조직은 이후 경무부(경찰청)로 통합되었지만, 조선 최고의 주먹 이성순(일명 시라소니, 1916~1983), 최치환(1922~1987, 전 서울시경국장·국회의원), 안응모(1931~2024, 전 치안본부장) 같은 인물들이 투신한 사례가 있어 흥미롭다.
1896년 제정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청나라 총리 이홍장을 압박해 동청철도 부설권을 양도받았다. 러시아는 동청철도(북만주철도·중동철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건설 인력과 군사력 배치가 필수적이라고 계산했다.
1897년 5월, 동청철도(시베리아 횡단철도 만주 구간) 산하에 특수부대인 동청철도경비대를 설치했다. 사령부는 현재 흑룡강성 아무르강 인근 하르빈에 위치했다.

러시아의 군사 엘리트 코스인 파블롭스크 군사학교와 총참모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게른그로스(당시 대령)가 초대 동청철도경비대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획자인 실세 비테 재무장관의 지휘를 받았다. 게른그로스는 단순히 철도를 경비하는 지휘관이 아니라, 만주를 ‘노보 러시아(새로운 러시아)’로 만들려 했던 제국의 핵심 군인이었다.
러시아는 주요 역마다 러시아인 거주지를 조성하고, 건설 초기부터 보병·포병·기병으로 구성된 경비 병력 4500명을 배치했다. 최신 군사장비인 맥심 기관총과 장갑열차를 보유한 정예부대였다. 철도 부설 관할 구역 내에서 중국 마적과 주민의 습격으로부터 공사 활동을 보호하고, 주요 역과 철로 구간, 철도 공장을 경비한다는 명분이었다.
1899년 산둥성에서 백련교 계열 의화단이 외세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 제국주의 침탈에 항거하는 중국인들의 항의와 시위는 당국의 방임 속에 전국적인 폭동과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기독교도 살해, 교회 파괴, 철도와 전신 시설 파괴 등 반외세 투쟁으로 이어졌다.
게른그로스의 동청철도경비사령부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열세한 병력 조건 속에서도 폭동으로부터 하르빈을 사수했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 진압을 명분으로 병력을 총 2만5000명, 4개 여단 규모로 증파했다. 하르빈을 거점으로 만주 전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 공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는 철도사령부 병력과 러시아 교민을 위한 대규모 군사시설, 군 병원, 정교회, 학교를 하르빈에 설립하고 치안과 사법권을 장악했다. 하르빈은 이때부터 단순한 철도기지가 아니라 러시아의 만주 지역 행정 수도로 개발되었고, ‘극동의 모스크바’라 불리며 군사 행정 중심지로 발전했다. 게른그로스는 만주를 통치하는 사실상의 ‘만주 총독’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명분으로 청으로부터 요동반도 남단 여순(뤼순) 지역을 조차했다. 1897년부터 관동지역(러시아어 크반툰스카야 주)이라 명명하고 러시아 총독을 배치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전진 배치하고, 뤼순 방어사령부와 철도 부설 지역의 행정·치안·사법·군사 권한을 모두 부여했다. 북만주 하르빈을 중심으로 대련·여순을 연결하는 남만주 철도 회랑은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 권역이 되었다. 위기의식이 극에 달한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야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동청철도경비사령부는 자아무르 군구 사령부로 개편되었다. 게른그로스는 초대 사령관(중장)으로 극동군 지휘 아래 참전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요동반도와 남만주는 일본, 북만주는 러시아 영향권으로 분리되었다.
가장 민감한 문제는 동청철도 운영권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여순–대련–창춘 남만주 구간은 일본에 양도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하르빈–만주리 구간은 러시아가 유지했다. 병력은 철도 1km당 15명으로 제한되어 3개 여단 규모로 축소되었다.

게른그로스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명성을 유지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해 보병 총사령관을 지낸 뒤 1917년 혁명 전후 퇴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만든 강력한 치안 조직은 하르빈을 사실상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고, 훗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관할권 내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915년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병력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동청철도 경비대는 민병대로 대체되었고 군사 공백이 발생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하르빈은 적군과 백군, 일본·미국·영국 연합군, 만주군벌이 뒤엉킨 혼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틈을 타 장쩌린은 철도 보호를 명분으로 호로군을 조직했고, 1925년 이후 철도는 만주군벌과 소련 공동 관리로 전환되었다. 1929년 봉소전쟁 이후 철도는 다시 소련 영향 아래 들어갔고, 1934년 소련은 만주국에 철도권을 매각했다. 이후 동청철도경비사령부는 해체되었고, 호로군은 일본군에 흡수되었다.

1920년대 초,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세력에게 하르빈은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중국 영토이긴 하나, 러시아의 군사행정력이 미치며 일본의 압박으로 벗어날 수 있는 전략지역이었다. 조선독립군에게 하르빈은 병참과 정보 수집의 핵심지역이었다.
패전한 러시아 부대나 체코군단으로부터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다.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반혁명군의 무기를 공급받아 혁명군(적군)과 연대하거나, 호로군(만주군벌 철도경비부대)과 연합하는 작전으로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어제의 동지와 적이 수시로 뒤바뀌는 상황에서 각 세력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무장투쟁의 여건은 고달프기 한이 없었다.
1929년 봉소전쟁은 소련군의 완전한 승리로 장쉐량의 만주군벌 부대는 패퇴하고 철도관리권은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1931년 9월 만주를 기습공격한 일본군(제1차 중일전쟁, 만주사변)에 의해 만주군벌 장쉐량은 만주에서 전면 철수하는 상황을 맞아 중국 관내로 군사이동한다. 소련정부는 1934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에 동청철도관리권을 매각하게 된다. 이후 ‘동청철도경비사령부’는 해체되고 ‘호로군’은 일본군에 흡수되었다.

만주의 급격한 정세 변화는 조선 독립운동 진영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독립군도 만주를 떠나 소련 영토나 중국 관내로 불가피하게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1930년대 이후 무장투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요인 암살과 소규모 유격투쟁, 빨치산 활동으로 전환된 배경이 된다.
반면 조선에서는 암울한 국내 상황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만주로 대거 진출한다. 만주국 정부와 만주군, 만주건국대학으로 취업하거나 유학하는 “가자 만주로!” 열풍이 불어닥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