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테네 광장에서 질문하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다. 가수 나훈아가 나를 ‘테스형’이라 하면서 ‘세상이 왜 이러냐’고 묻길래, 우연히 그대들의 나라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게 되었다. 단연코 나는 예언자가 아니며, 정책을 수립하는 설계자도 아니다. 다만 질문으로 답을 얻는 자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묻는다. 차분히 응답하라.
먼저 공천 헌금 논란이다.
처음 부정했던 것과 달리 1억 원이 오고 간 것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돈은 받았지만, 불법이 아니다”라는 당사자의 변을 들었다. 이를 보면서 찔리는 정치인이 많다는 것도 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가 많다는 것은 아직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다.
여기서 묻는다. 법에 맞는 것이 곧 정의인가. 만약 돈이 권력의 문을 여는 열쇠라면, 그 문은 이미 그대들에게 열려 있다. 그대들이 지키려는 것이 권위인가, 아니면 권위를 앞세운 부의 축적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무시하고 무지를 변명할 때, 도덕은 더 많은 의심을 받는다.
통일교 자금 논란도 그렇다.
신의 말씀이 정치적 언어에 섞여 번역되는 순간, 신도 정치도 모두 위험해진다. 아테네 시민들이 나에게 뒤집어씌운 신성모독죄가 그 예다. 종교적 믿음은 자발적일 때 존엄하지만, 권력과 결합할 때는 거래가 된다. 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정치가 구원을 약속하는가. 이를 혼동하는 순간, 그대들을 따르는 국민은 신도가 되고, 변명은 믿었던 종교를 버리는 배교가 된다.
산불 예방에 앞장서야 할 산림청장의 음주 추태를 보면서 나는 익숙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테네의 귀족정이다. 이들은 “이 사람 말고 누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되물었다. 왜 이 사람인가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권위는 변명에서 나오지 않는다.
질문을 견뎌내는 힘에서 나온다. 능력과 도덕, 전문성과 정치적 계산이 뒤섞일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설명이다. 설명이 부실한 권력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깎아 먹어 버티기 힘들다. 대한민국 산림청장으로 임명된 김 씨는 스스로 산림청장감이라고 자기를 추천한 사람이다.
무수한 의문과 불편한 진실을 ‘편안한 거짓’으로 버무리는 블루필(Blue Pill)은 그래서 안 된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전염 때문이다. 더 많은 핑계를 대는 것보다 타인의 눈높이를 의식하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이유다. “탈옥으로 목숨을 유지하자”는 제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독배를 들었던 나의 죽음을 기억하라.
야당 대표의 단식과 독단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배를 곯아 뜻을 전파하는 정치는 거리에 울리는 사이렌이다. 단식은 개인의 결단이지만, 그 반복은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묻는다. 왜 말로 해결하지 않고 몸으로 증명하는 환경을 만드는가.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면, 몸을 해치는 행위는 타협의 언어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독단이 존중받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토론이 사라진 사회다. 극단 투쟁은 미덕이 아니라 정치의 비상등이다. 대화와 타협이 살아 있다면 몸을 희생할 이유는 없다. 단식과 독단이 반복될수록, 정치가 말을 잃고 죽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식상한 질문 하나 하겠다.
그대들은 정의로운 나라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기편이 이기는 나라를 원하는가. 그대들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이 설명 부족으로 헷갈리기 일쑤여서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견디는 답이 어눌할수록 승리는 공허하다.
나는 아테네에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을 화나게 했던 행동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 이는 그대들의 정치적 언어가 스스로를 점검하는 필터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법을 피하는 기술이 정치의 능력으로 칭송될 때, 공동체는 스스로의 신뢰를 갉아먹고 민주주의는 소음만을 남긴다.
특검을 둘러싼 여야 찬반 논란에 대해 나는 어느 쪽의 구호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질문한다. 특검 반대가 진심인가, 아니면 정치적 행위인가. 특검은 상대를 겨누는 칼이 아니라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종교가 정치의 이름으로 소환될수록 필요한 것은 위법을 가려내는 진정성과 종교 자유에 대한 존엄이다.
여기서 행할 것이 있다. 특검을 요구하는 쪽은 정치적 이득을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는지, 반대하는 쪽은 자신의 과거를 검증에 맡길 용기가 있는지 답하는 것이다. 이 속에는 “그대는 검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운가?”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다. 정의는 서두른다고 완성되지 않고, 미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밝혀지느냐다.
마지막으로 ‘천국은 있던가요’라고 묻는 나훈아에게 ‘천국은 사후에만 만나는가’라는 되물음으로 갈음한다. 천국은 그대 속에도 있다. 정치 역시 승리할 때가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과정에 천국이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 죽더라도 규칙(악법도 법)을 지키는 태도, 국민을 섬기는 마음” 이 셋을 무시하면 천국은 만나기 힘들다.
그대들이 나의 질문을 불편해한다면, 그대들의 나라에 아직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나에게 독배를 마시도록 한 아테네 배심원들처럼 질문을 가로막지 말고, 답을 찾을 때까지 대화하라. 그것이 시민과 권력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대화의 기술’은 단순한 말하기를 넘어 상대방과 신뢰와 공감을 형성하는 소통의 능력입니다. 좋은 대화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면서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기본과 양심을 알고 지키면 답을 찾기 쉽지 않을까?합니다만 ..
쉬운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 …
천국을 만날 수 있는 정치인,,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