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추모] 이해찬 전 총리…제주특별자치도 밑그림 그린 설계자

2005년 4월 3일 제57주년 제주4.3사건 범도민 위령제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 <출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 하늘이 온통 잿빛 슬픔으로 내려앉았습니다. 한라산의 어깨 위로는 하얀 눈꽃이 하염없이 피어납니다. 마치 제주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한 거목을 떠나보내는 대지의 눈물인 듯, 산천도 침묵 속에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밑그림을 그린 설계자였고, 척박한 땅에 국제자유도시라는 비전을 심은 정원사였으며, 4·3의 깊은 흉터를 어루만져 ‘평화의 섬’으로 꽃피운 장본인이었습니다.

그와 제주의 인연은 2001년, 제주 국제자유도시 추진의 닻을 올리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총리직에 오른 그는 제주의 정체성을 ‘특별자치’와 ‘국제자유’라는 두 기둥 위에 세웠습니다. 그가 꿈꾼 것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었습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넘어서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권한을 이양해야 한다”던 그의 목소리에는, 제주를 대한민국 분권의 심장으로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4·3의 시린 역사 앞에서 누구보다 단호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을 직시하고, 국가의 책임과 사과를 공식화하며 희생자들의 명예를 복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전파하는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염원은 2005년 ‘세계 평화의 섬’ 지정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제주가 북한에 보낸 감귤을 보며 남북 교류의 희망을 읽어내던 그의 시선은, 언제나 화해와 포용, 그리고 공생의 내일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제주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현실적 토양 위에도 닿아 있었습니다. 교육과 의료의 규제를 허물어 제주를 서비스산업의 허브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고집이 오늘날의 영어교육도시를 일구었습니다. 제주의 생존권이 달린 기반 시설 확충에도 그는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기자로서 마주했던 그는 세간의 이미지보다 훨씬 부드럽고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나의 취재 노트 속에 박제된 그의 철학은 명료했습니다. △파격적인 지방 분권, △철저한 역사 바로 세우기, △규제 혁파를 통한 경제 성장. 그는 제주의 미래를 설계한 건축가이자, 제주라는 섬에 무한한 연정을 바친 연인이었습니다.

문득 서재의 한 구석, 빛바랜 책 한 권에 시선이 머뭅니다. 대학 시절 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C.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 인생의 고비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던 그 책의 번역자가 바로 이해찬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전율을 기억합니다. 그가 책 속에서 길어 올린 치열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제주의 산천에 쏟아부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깊은 경외심을 느낍니다.

이제 그는 지상의 짐을 내려놓고 제주의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되었습니다. 고 이해찬 총리님, 당신이 설계한 이 아름다운 섬에서 편히 쉬소서. 당신이 심은 비전은 이제 제주의 바람이 되어 영원히 숨 쉴 것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건일

아시아기자협회 이사, 한라일보 전 사장, 제주mbc 전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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