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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 16] 150년 전 ‘러시안드림’의 감격과 통곡

필자 이택순 전 경찰청장

언론인 김호준의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자료에 의하면, 1882년 기준 연해주의 인구는 고려인이 10,137명, 러시아 인은 8,385명이었다. 무국적자, 일시 노동자를 제외하더라도 고려인이 러시아인보다 다수였다.

이번 방문지는 라즈돌노예(한자어 하마탄)라는 블라디보스토크 가는 길목(75Km 거리)에 위치한 한적한 지방 철도역이다.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 발-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1863년 여름, 두만강 접경지역 포시에트 구역 지신허에 최초로 정착한 고려인(조선말기 함경도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어 중국 국경 가까운 곳에 얀치헤(연추)마을을 개척했다. 포시에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도로변에는 1870년에 이미 20여 개의 고려인 부락이 계곡과 강변을 따라 확대되고 있었다.

각 부락에는 작게는 20가구, 많게는 100여 가구가 모여서 살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부락들은 아지미, 슬라비얀카, 시지미, 바라바쉬(멍구가이), 라즈돌노예(하마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려인 정착지였다.

크라스키노-블라디보스토크 간 도로와 한인 개척지 <출처 조미향 작가>

계속 몰려드는 고려인들은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대륙을 향해 계속하여 이동해 나갔다. 고대 발해왕국 이후 최대 규모로 한민족이 북방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이곳 라즈돌노예 지역에는 1869년 최운보(지신허의 최초 이주자)로 추정되는 진취적인 인물이 30여 가구를 인솔하고 이동해왔다. 우수리강 남부 곡창지대인 수이푼(한자어 추풍)으로 진출하기 위해 들렀다.

​이로써 남쪽 두만강변에 정착하던 고려인들은 연해주 곡창지대로 진출해 기아와 질곡에서 해방되는 러시안 드림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이주한 농민이 주류였지만, 벌목장과 탄광, 해산물 채취 등의 노역에 조사하는 계절노동자도 붐을 이루었다. 포시에트 항만, 군부대 막사, 블라디보스토크행 국도와 철로를 포함한 각종 인프라가 고려인의 땀과 노동으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하싼군 소재지, 슬라비얀까 리조트 지역

우리가 휴식을 하기 위해 들른 슬라비얀까 지역도 초기 정착인은 고려인이었다. 1870년대 고려인이 개척하여 평온하게 살다가 60여 년 뒤 강제로 추방당했다. 빈 땅은 오늘날의 하싼군청 소재지가 되었고, 연해주 러시아인이 가장 선망하는 현대식 휴양지로 발전하였다.​

언론인 김호준의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자료에 의하면, 1882년 기준 연해주의 인구는 고려인이 10,137명, 러시아 인은 8,385명이었다. 무국적자, 일시 노동자를 제외하더라도 고려인이 러시아인보다 다수였다.

부유하지는 못해도 경작할 농토가 있었고, 일자리가 있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빈부의 격차는 있어도 부당한 착취와 사회적 차별이 없어 조선인들이 계속하여 봇물처럼 유입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아프리카와 남미의 난민이나 북한의 탈북자들도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개척자 고려인 3대, 그등은 자유와 안도를 느꼈을 것이다 <출처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고려인들은 모국인 식민지 조선에 비해 비교적 풍족한 삶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을사늑약(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망국을 체감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망명 지사들이 고려인의 번영에 기대하며 연해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항일독립투쟁의 최대 배후지가 된 것이다.​

70여년 간 가꾸어 온 고려인들의 기대가 한창 영글어 갈 즈음, 평온하게 유지되어온 고려인 사회를 초토화 시키는 청천벽력의 악랄한 정책이 펼쳐진다. 1930년대 들어 스탈린 정권이 비밀리에 시도한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이었다. 18만 고려인 모두를 일본 침략의 잠재적 위험요소로 간주해, 극동의 국경지방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강제이주 화물열차에 실려가는 고려인, <자료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1937년 9월 9일 깜깜한 밤, 대륙의 한기가 라즈니돌노예 역사를 감싸며, 짓누르는 공포와 끝없는 불안이 역 광장에 스며들고 있었다. 소비에트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수많은 고려인들이 겁에 질린 체 보따리 몇 개를 들고 시베리아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제이주 통보는 겨우 1주일 전에 받았다. 어느 곳으로 가는지도 몰랐다. 조부 때부터 70여 년간 개척하며 가꾼 정 든 집과 농토였다. 가재도구와 농작물 가축을 그대로 두고, 무조건 라즈돌노예 역으로 모이라는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쥐꼬리만한 보상을 쥐여주고, 마치 인도적 대우를 하는 것처럼 위장한 고려인 말살책략, 인종차별책이었다.​

이와 관련한 사전조치와 강제이주는 연해주 고려인뿐만 아니라 전 러시아에 진출한 고려인에게 적용되었다.

현역군인 장교조차도 전역 조치 후 체포 이동을 명령받았다. 하바롭스크의 충성스러운 빨치산 출신 투사, 흑해연안에서 대학에 다니던 학생에게도 체포 명령을 내렸다. 거부하는 자는 일본 간첩으로 몰아 체포 구금 처형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개 같은 대우가 아니라, 개 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라고 고려인은 울부짖었다.​

라즈돌노예 청사 전경
청사 현판

2025년 6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 라즈돌노예 철도 역사는 인적조차 드물어 정적이 깔려 있었다. 투박한 공장처럼 생긴 새 역사 건물에서 1937년의 비참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없다. 건물의 모든 문은 굳게 닫혀있다.

아! 이런 한가한 시골역에서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제이주를 이곳에서 시작했구나!​ 이 역이 시민이 이용하는 철도 역사인지, 창고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은 그날의 공포가 어른거려서였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침묵과 시간이 정지한 정적!

아직도 러시아 곳곳에는 스탈린 탄압정치와 소비에트 유산이 깊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베리아 횡단 화물열차

1870년대, 이곳에서 고려인들은, 두만강 접경지역을 벗어나 러시안 드림을 꿈꾸며 새로운 정착지로 이동하는 감격에 눈물 흘렸다. 그리고 70년 뒤, 산천을 울리는 커다란 통곡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들은 짐짝처럼 화물칸에 실려 피눈물 흘리며 어두운 대륙을 유랑하게 된다.

철길에는 그날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듯,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주 길게 차량을 매달고 유유히 대륙의 길을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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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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