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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⑧] ‘포시에트’의 기대와 실망···’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백마탄 장군’ 김경천·’조선의 레닌’ 김아파나시의 쓸쓸한 흔적

오늘은 포시에트(한자로는 목허우)라고 부르는 연해주남부 두만강 접경지역을 찾아간다. 포시에트는 중국 쪽 국경출 구 크리스키노, 고려인 최초 정착지 지신허와 그리 멀지 않은 권역에 있다. 러시아식 거리 개념으로 보면 10-20km 거리는 같은 동네, 동일 생활권에 속한다. 포시에트는 연추에서 20km, 지신허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다.

연해주 남부, 훈춘-크라스키노-지신허-포시에트 주변요도

포시에트는 두만강과 가장 가까운 러시아 항구로, 한국의 동해안 항구와 산천초목이 유사하며, 야산에 둘러싸인 포근한 작은 항구다. 한반도와 비슷한 기후와 자연조건이 포시에트 주변에 고려인(조선 말기 함경도에서 이주한 한인)이 다수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현지에서 보면 포시에트라는 구역은 크라스키노, 얀치혜(연추), 지신허를 포함하는 광역으로 두만강 접경지역을 포괄하는 전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곳 포시에트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최재형 선생의 유일한 사진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58-1920)이 지신허의 집에서 가출을 해 도약하는 삶을 개척하는 계기가 된 항구였다. 최재형은 소작농이던 아버지 최홍백의 손을 잡고 9살 되던 1867년 러시아 땅 지신허에 이주했다. 이주 후에도 기약 없는 기아 속에서 11세가 되던 해(1869년) 근처의 항구 포시에트로 무작정 가출했다. 거리에 쓰러진 그를 발견한 러시아 선장 부부 손에 이끌려 러시아 상선을 타며, 소년 선원으로 6년간 세계일주 경험을 쌓고 1875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소작농(상놈)의 자식이 6년 만에 세계의 물정과 근대 항해술, 그리고 산업혁명의 격랑을 겪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인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가 지득한 세계 경험과 지식은 조선이라는 봉건사회의 상놈에게는 절대로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쇄국의 벽과 신분의 차별을 넘어서는 가히 혁명적인 성취였다.

​1875년 당시 조선은, 대원군과 민비 일족의 권력 다툼 속에서 쇄국정책과 사대주의로 일관했다. 종로 북촌 개화파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양반 청년 몇 명이 지구본과 청나라 책을 놓고 개화를 담론하는 수준이었다. 상놈의 아들인 최재형의 세계 경험은 1894년 갑오경장이라는 일본에 의한 반강제적 조선근대화보다 20-30년 앞서는 것이었다.

​그는 능숙한 러시아어와 세계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당국자들 가운데 주로 군인들과 깊은 교분을 갖게 된다. 얀치혜 지역 군부대 건설공사와 도로공사, 군납업에 종사하며 단기간에 연해주 최고의 부를 축적하고 유력 인사가 되었다. 그는 얀치혜(연추)에 거주하며 고려인 동포들의 교육과 불우한 삶의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지역의 도헌(우리의 읍장)이라는 공적 직위까지 받고,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린다.(조선은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이 대표로 참가) 황제의 대관식에서 조선귀족 민영환을 만나는 상놈 최재형의 표정은 어땠을까?

​막대한 부의 축적과 러시아 당국의 신뢰 속에, 러일전쟁 후 패망해가는 조선에서 망명하는 양반 출신 독립지사들의 도움을 요청을 받게 된다. 양반 상놈을 초월해 그는 기꺼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게 된다. 이 모두 포시에트로의 가출에서 출발한 것이다.

김경천의 기병장교시절 의연한 모습-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소장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1920년대 일본 육사 출신 독립투사 김경천의 포시에트 진출이다. 1920년 망명 초기에 김경천은 수청(파르티잔스크)의 승리로 ‘백마 탄 김장군’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이후에도 러시아 백군과 철수하는 일본군을 습격하며, 1922년에는소비에트혁명군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으로 포시예트 지역사령관으로 임명을 받는다.

1만여 명의 병력을 모집해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조국 독립을 쟁취하려던 대망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 곳이 포시에트였다. 그것도 한때 1923년 가을 소비에트 정부가 일본군이 철수함에 따라 유격대 해산명령을 내림으로 해 무장투쟁의 꿈은 사라졌다.

사회주의혁명 이론가 김 아파나시의 청년 시절-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소장

10년 뒤에는 고려인 2세 김 아파나시(한국명 김성우 1900-1938)의 활약이 포시에트를 빛나게 한다. 김 아파나시는 고려인 2세로 포시예트 구역 수하노프카 촌에서 출생한다. 어린 시절 초등-중등과정의 러시아 정규교육을 이수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청년이었다. 1919년 3월 반일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항일 잡지를 만들며 일본 총영사관에 항의 성명을 제출하는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매우 영민한 인물이었다. 소비에트 혁명당원으로 1920년과 1921년에는 여운형과 이동휘의 레닌 회동 시 모스크바 방문에 통역으로 참가하며 청년 시절부터 혁명의 불꽃을 높이 올렸다. 이어서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중심의 상해파 공산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고려인 2세 중에 가장 뛰어난 혁명 이론가로 ‘조선의 레닌’이라 불릴 만큼 고려인 사회의 기대가 큰 인물이었다. 그는 꿈이 있었다. 김경천의 군정이 수찬지역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고려인에게 자치권만 주어진다면 수찬처럼 자율적으로 치안을 확보하며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에게는 모국 한국의 독립문제와 고려인 자치문제 추진을 위해 러시아 혁명세력을 설득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1935년에는 고향 포시에트구역의 공산당 서기로 부임해 열정적으로 혁명운동과 고려인 자치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념은 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인가?

충성스러운 혁명가인 그마저도 1936년 일본간첩이라는혐의로 체포되고 3년 유배형에 처해진다. 1938년에 다시 체포되어 일본의 밀정혐의로 재판 없이 총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1937년 전부터 고려인 강제이주가 밀실에서 스탈린의 지휘 하에 기획되고 있었다. 사전에 영향력 있는 고려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숙청하는 비열한 민족차별 정책의 억울한 희생자가 된 것이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포시예트 박물관의 수장품
포시에트 지도

2025년 6월 우리가 방문한 포시예트는 러시아인의 작은 부락으로 변해 있었다. 석탄 환적으로 유명했던 항구는 침체 속에 인적조차 드물었다. 러시아 노인의 안내로 들어선 골동품 보관소 같은 허름한 박물관은 현재의 포시예트를 상징하는 듯하였다. 발해와 여진족, 고려인, 러시아인들의 출토유물이 좁은 공간에 혼란스럽게 섞여있다.

포시에트박물관 외부에 진열된 야포와 전차, 그리고 한적한 시가지

연해주의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백마 탄 장군 김경천, 조선의 레닌 김 아파나시의 영혼을 기대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가? “160년간의 역사는 다 이런 전쟁 장난감 같은 것이다.” 박물관 앞 풀밭에 진열된 작은 대포와 전차가 말하는 듯하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영걸들을 찾아 이제 우리도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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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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