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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칼럼] “나는 정직하기로 했다. 약점이나 못난 점만 드러내기로 했다”

연애 시절이었다. 속이기 싫었다. 아내에게 허물어져 가는 변두리의 오래된 일본식 작은 목조집을 보여주었다. 내가 자란 집이었다. 빈민촌의 숙부 집도 구경시켰다. 리어카를 끌고 거리에 나가 행상을 하던 숙모가 장사를 접고 고기를 한 근 사 가지고 와서 삶아 주었다. 아내가 될 사람을 인사시켰다. 숙모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거짓과 허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애썼다.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연애 시절이었다. 속이기 싫었다. 아내에게 허물어져 가는 변두리의 오래된 일본식 작은 목조집을 보여주었다. 내가 자란 집이었다. 빈민촌의 숙부 집도 구경시켰다. 리어카를 끌고 거리에 나가 행상을 하던 숙모가 장사를 접고 고기를 한 근 사 가지고 와서 삶아 주었다. 아내가 될 사람을 인사시켰다. 숙모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거짓과 허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애썼다.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본문에서 사진은 필자 엄상익 변호사

가수 조영남 씨가 옛날 세시봉 무대 시절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송창식에게 초콜릿을 줬더니 “그런 거 우리 집에 많아”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한 대 때려줬다고 했다.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게 못마땅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프로그램에서였다. 사회자가 “그때 진짜 맞았느냐”고 물어봤다. 송창식 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때는 입에서 나가는 것마다 거짓말이었어.” 솔직한 고백이었다. 나는 그런 드러냄을 좋아한다. 성공했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는 건 쉽지 않다.

내 주위의 법조인 중에는 죽을 때까지 상처를 꽁꽁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시절 넝마주이를 했던 검사는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 어떤 고위직 법조인은 엄마가 창녀촌에 젓갈을 팔러 다니던 사실도 끝까지 숨겼다. 나는 거짓말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가정환경을 조사한다고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집안의 재산을 물었다. 세 들어 살지 않는지, 전화나 냉장고가 있는지, 자가용이 있는지 하면서 시시콜콜 구체적으로 물었다.

있는 집 아이들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있어야 했다. 가정환경 조사서도 아이들이 다 볼 수 있었다. 당시 명문 중학교라 불려서 그런지도 몰랐다. 재벌집 아이들이 많았다. 장관이나 판검사, 병원 집 아이들도 있었다. 기업의 사장들도 즐비했다.

우리 아버지만 말단 사원이었다. 자기가 누구의 몇 대손이라고 가문을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한 답안지도, 정승·판서의 임명장인 왕의 교지도 집에 있다고 했다.

내 조상은 역적이 되어 산속에서 이백 년 숨어 살았다. 역적의 삶은 노비만도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위축됐다. 거짓말쟁이로 변했다. 다 있다고 했다. 아버지도 높은 사람인 것처럼 연막을 피웠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비밀이 늘어났다.

거짓말을 하니까 모든 게 비밀이 됐다. 한번 몸에 밴 버릇은 오래갔다. 대학 시절 친구들 앞에서 한참 허풍을 떨고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싫어졌다. 친구들의 눈은 ‘다 알면서 들어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시 낭인 시절도 암자의 뒷방에서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지내면서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잠시 개천에 있지만 이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고 나를 세뇌시켰다. 돈키호테같이 행동했다.

어느 날 몽유병 환자같이 꿈꾸며 다니던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 고시에서 떨어지고 군에 들어가 최전방 부대에 배치됐다. 돈 있는 집 아들들은 엉뚱한 병명으로 군 복무를 쉽게 면제받던 시절이었다. 하얀 눈이 두껍게 덮인 벌판에서 순찰을 돌던 새벽 시간, 나는 나를 자각했다. 돈키호테가 망상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할까.

나는 치수에 맞지 않던 거짓으로 만든 망상 속의 무대 의상들을 벗어던졌다. 발가벗기로 결심했다.

박쥐가 타조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강아지가 ‘나는 늑대야’ 하고 자기 최면을 걸었었다. 숨겼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애 시절이었다. 속이기 싫었다. 아내에게 허물어져 가는 변두리의 오래된 일본식 작은 목조집을 보여주었다. 내가 자란 집이었다. 빈민촌의 숙부 집도 구경시켰다. 리어카를 끌고 거리에 나가 행상을 하던 숙모가 장사를 접고 고기를 한 근 사 가지고 와서 삶아 주었다.

아내가 될 사람을 인사시켰다. 숙모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거짓과 허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애썼다.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우연히 성경에서, 그 높은 하나님이 구름 위에 있지 않고 세상에 내려와 가난한 집 아들로 노동자로 지낸 걸 알았다. 욕먹고 무시당하며 살다가 벌거벗긴 채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걸 인생의 샘플이자 삶의 매뉴얼로 삼으라고 했다. 나는 먼지 같은 존재임을 알라고 했다.

한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머리가 나쁘다고 내가 왜 고민해요? 만든 하나님이 고민해야죠. 나 시험도 떨어지고 ‘똥통’이라고 부르는 학교 나왔어요. 가난한 집에서 어려서 지게를 지고 다녔죠.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와서 더 비참하게 살다 간 걸 보니까 열등감이 없어지고 자존감을 가지게 됐어요. 정체성이 변하고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됐죠.”

나는 정직하기로 했다. 내 약점이나 못난 점만 드러내기로 했다. 버릇이 순간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때는 정정했다. 글을 쓸 때도 쌀 속의 티를 체로 걸르듯, 침묵의 체로 거짓과 위선을 걸러내려고 애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정직이 겸손이고, 그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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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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